등소평(鄧小平)

흑묘백묘(黑猫白猫)론

흑묘백묘(黑猫白猫)는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이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등소평(鄧小平,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주장하면서 유명해진 말로, 흔히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라고 한다. 즉 고양이 빛깔이 어떻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흰고양이)든 공산주의(검은고양이)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지라는 뜻의 선부론(先富論)과 함께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용어이다.

그 뒤 흑묘백묘론은 1980년대 중국식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고, 덩샤오핑의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였다. 다시 말해 경제정책은 흑묘백묘식으로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다. 흑묘백묘론에 근거한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성장을 이끌어, 현재 많은 이웃 국가들에게 있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시장으로, 또 한편으로는 오래 지나지 않아 세계의 패권을 휘어잡을 위협의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등소평(鄧小平)은 1904년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는 중국 근대사에 있어서 과도적인 시대였다. 1905년에는 강유위, 양계초 등이 이끄는 유신운동이 실패로 끝났고, 손문이 이끄는 동맹회가 결성되어 중국 각지에 여러 차례의 반청무장봉기가 전개되었다. 등소평이 7세가 되던 1911년에는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이 건국되었고, 그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 해인 1919년에는 5·4운동이 전개되어 등소평도 중경에서 이에 참가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등소창, 자는 문명이라고 하는데 경제적으로는 소지주였으며, 군인으로서 비밀결사체의 지방책임자로 있기도 했다. 그는 당시 국가외 사회현실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사회변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개화된 인물이었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등소평이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사회현실을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등소평이 16세가 되던 1920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된다. 등소평은 프랑스에 유학온 학생중에 가장 어린 열 여섯의 나이로 낮에는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견디기 어려운 중노동과 저임금, 실직과 기아 등을 체험하면서 피부로 느낀 자본주의사회의 무자비한 착취, 서양인 감독으로 받는 모멸감과 굴욕감 등은 이후 등소평이 점차 급진적으로 변하게 하였다. 파리 유학 중이던 1924년 당시 20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29년 광서성에서 폭동을 주도했고 농공홍군(農工紅軍) 제7군과 제8군을 창설해 혁명거점을 건립함으로써 일찍이 혁명가적 기질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