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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그 과정에서 혼란을 느낄 때

젊을수록 돈을 아껴라

수입에 비해 가장 많은 지출을 하고 싶은 시절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 시절 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놀러 가고 싶은 곳도 많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돈 쓸 곳이 하나 둘이 아니고 멋진 이성 친구를 사귀고도 싶고, - 갖고 싶은 것들도 적지 않은 때가 20대와 30대이다. 결혼을 할 때도 기억에 남는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고 가구도 좋은 것으로 장만하고 싶고 뭐 그럴 것이다. 온갖 잡지들과 TV 광고 속에서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젊은 모델들처럼 살고 싶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부잣집 친구들에게 시샘과 부러움이 솟아나기도 하는 시절이 그 시절 아니겠는가.

그러나 명심해라. 당신이 돈 많은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수입에 비하여 가장 많은 저축을 가장 악착같이 하여야 할 때가 바로 그 시절이다. 20대와 30대 시절에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수호하기 위하여서건 취미를 위하여서건 그 어떤 명분으로 사용하는 돈이건 간에 그 돈이 모여 적절하게 투자될 경우 10년 후에는 그 수익금만으로도 같은 행위를 할 수 있다. 20대와 30대에 모은 1억원이 40대에 가서는 10억원이 되어 그 수익금이 1억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20대와 30대에 소비한 1억원은 40대에 가서 그저 사진첩 몇 권 정도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게다가 30대에 1억원을 모으는데 들어가는 노력은 40대에 1억원을 모으는데 들어가게 될 어려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 쓸 곳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출을 줄이는 대신 쉽게 떼돈을 벌어 자신의 욕구를 더더욱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기면서 주식이나 다단계의 미혹에 빠져 든다. 내가 독자들에게 받는 메일들 중 정말 대책이 안서는 경우가 바로 그렇게 해서 빚을 많이 지게 된 사람들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사람들은 고통을 받아도 싸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수술비 때문에 빚을 지게 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 빚이 가족의 잘못으로 인한 경우는 어느 정도만 안타깝게 여기며 친구나 타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빚이 생긴 경우는 조금만 안타깝게 여긴다. 본인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빚이 있는 경우 재테크 투자에 대한 공부는 언제나 무모함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에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주는 조언은 오직 한 가지, 재테크에 대한 공부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거지처럼 살면서 빚부터 갚으라는 것뿐이다.)

물론 여기서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찬란한 젊은 날들의 그 아까운 청춘을 돈을 모으는데 만 집중하며 살다가, 즐길 수 있는 시간 다 지나간 뒤 죽기 직전에 부자가 되면 무엇 하겠는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늙으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돈 때문에 바둥거리며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병이라도 걸리면 누가 그 시절을 보상하여 준다는 말인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찬란한 젊음이라는 것을‘제 딴에는 찬란하게’보내면 보낼수록 중년 이후에는 쳐진 어깨를 감수하여야 할 것이다. 젊었을 때 신나게 노는데 돈을 다 써 버리고 늙어서 돈도 없이 비참하게 되는 경우는 왜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조화와 균형을 부르짖으며 젊음을 보냈던 부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내게 데리고 와 봐라. 젊음을 즐기면서도 부자가 되려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다 잡으려는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여기서 당신이 놓치기 싫어하는 그 청춘이라는 토끼에 대해 한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잘난 청춘 시절에 돈과 시간을 바치며 하고 있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한번 지금 당장 적어 보아라. 이웃을 위한 봉사라도 한다면 내가 말을 안 한다. 기껏해야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인터넷에서 채팅이나 하는 것이 젊음을 불사르는 고귀한 행위란 말인가? 밤거리에서 술에 취해 이리비척 저리비척 하는 것이 젊음의 표출인가? MT 나 연수라는 명목으로 집단으로 몰려가서 고스톱 치고 술 먹고 토하고 여자 친구 자빠뜨릴 생각을 하는 게 청춘이라고? 친구 생일에 다 같이 술에 취하는 것이 젊은 우정의 표출이라고?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마저 유명 브랜드 상품에 쓰는 바람에 카드빚에 시달리면서도‘있는 놈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가 안 보인다’고?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 성공한 사람들이, 깨끗하게 부자가 된 사람들이, 너희처럼 청춘을 보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멍청한 놈(년)들.

부자로 살고 싶다면 젊은 시절에 철저하게 돈을 움켜쥐어라.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결혼식도 간소하게 하고 모든 허례허식을 물리쳐라. 나는 도대체 전세를 살고 있으면서도 아이 돌잔치를 호텔에서 하는 젊은 부부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돌잔치가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말은 하지도 말아라. 그 아이가 기억도 하지 못할 일을 하면서 아이를 위하여 한다고? 남에게 보이려고 혹은 부모가 즐기려고 하는 것이지 그게 어디 아이를 위해 하는 것이란 말인가. 부조금 받으면 큰 돈 들어가지 않는다고? 부조금 받지 않고 그냥 가족 끼리 조촐하게 하면 아이에게 큰일이라도 생기나 보지?

신혼부부들에게 주는 경고: 비빌 언덕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면 결혼 후 5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시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면 당신들은 평생 부자가 되기 힘들다. 혼인 비용을 최대로 줄이고 현금을 보유해라. 가구도 가장 싼 것으로 장만하고 그 어떤 것이건 간에 중고 물품도 고려하여 보라. 호사스러운 혼수품도 5년 후면 고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결혼예물? 부잣집 친구들을 절대 따라 하지 말라. 일생 한번 밖에 없는 결혼식인데 돈 좀 써야 하지 않느냐고? 글쎄다. 그렇게 시작한 부부들 3~4쌍 중 한 쌍은 이혼하며 대다수는 평생 돈 걱정 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총각시절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은 대부분 중고였다. 결혼 전 내가 아내에게 사준 첫 커피는 특급호텔 커피였으나 첫 음식은 청계천 벼룩시장에서 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끓여주는 천원짜리 동태찌개였고 첫 선물은 그 시장에서 팔던 천원짜리 목도리였다. 결혼 전 나는 빚도 많았었기에 아내에게 와인 한잔 사준 적도 없다. 당신이 처녀라면 그런 나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내게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했다. 그 당시 내 처지는 빚이 많았기에(당시 동부 이촌동 25평 맨션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여자에게 먼저 프로포즈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결혼 후 나의 월 수입은 결코 적지 않았으나 내가 진 빚부터 갚아야 했기에 우리는 전혀 돈을 쓰지 못했다. 결혼 후 2-3년이 지나자 나는 빚도 갚을 수 있었고 어느 상호신용금고에서 경매로 넘기기 직전의 아파트를 싸게 구입하였다. 하던 사업도 그럭저럭 되어 가면서 다시 1년 후 자가용과 기사도 마련하였고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20억이 현금으로 모일 때 까지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도, 내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말도 하지 않았고 티도 별로 내지 않았다(돈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언제나 날파리들이 몰려든다.) 자가용과 기사를 둔 것은 돈 있는 티를 낸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길거리에 허비하는 시간을 절약하려고 그랬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젊은 시절에 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특별한 재능도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당신 호주머니에 돈이 쌓이는 법칙은 단 하나라는 사실이다.‘먼저 몸값을 올려나가면서 최대한 절약하고 최대한 먼저 모아라. 그러면 먼저 쌓일 것이다.’그 쌓인 돈이 부자가 될 종자돈이 된다. 젊었을 때 놀 것 다 찾아다니고 즐길 것 다 찾아다니며 카드를 긋고, 쉴 것 다 찾아 먹는 사람들이여. 당신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았던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 당신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젊음을 보냈던 사람들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라. 명심해라. 당신이 생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음 시 구절이 당신의 마음을 송곳처럼 찌르게 될 것이다.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어릴 때부터 가난, 술, 여자, 동성애, 질병, 교도소 등의 단어로 얼룩진 지저분한 삶을 살다가 동거하던 창녀 앞에서 죽었던 Paul Verlaine 의 시‘하늘은 지붕 위로’에서 인용함.)

하늘은 지붕 위로

하늘은 지붕 위로 저렇듯 푸르고 조용한데,

지붕 위에 잎사귀를 일렁이는 종려나무.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 부드럽게 우는데,

나무 위에 슬피 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변화가 없는 삶은 불행하다

부자들에게는 불행하고 가난하였던 과거가, 나의 경우도 그렇듯이 종종 훈장처럼 따라 다닌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담은 불행한 상황을 자기 힘으로 역전시켜 행복한 상황으로 만든 사례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하여 끼니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는데 노력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곧 그들의 삶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었음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푸세식 변소에서 냄새를 참으며 용변을 보던 사람이 수세식 양변기에서 쾌적하게 용변을 본다고 해서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돈이 많아지면 불편하고 구차한 환경이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변할 뿐이다. 생활수준이 높다고 해서 높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비슷한 예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명한 대학에 들어갔다거나 수년간 어렵게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성공담과 관련하여서도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불행 끝, 행복 시작”의 사례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좋은 학력을 갖게 되었을 뿐이고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하였을 뿐이다. 그렇게 하여 이 사회에서 얻게 될 대가가 좀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행복의 필수조건으로 착각하지는 말라.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보여주고 나서“꿈을 가져라” 혹은“야망을 가져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마치 명예나 지위, 돈, 학벌 등에 대한 꿈과 야망이 성취되어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성공하게 되면 기쁨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잠시 뿐이며 그 어떤 성공이건 간에 결코 행복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목표가 성취되면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뿐이지 그 성취감이 행복과 동의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갔다고 해서 행복해졌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TV 프로그램‘성공시대’(이미 방송이 끝났지만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므로 가능한 많이 보아라)나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본받아“나도 저렇게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저런 사람이 안 되면 내 삶은 불행하여 진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분명히 말한다. 그 어떠한 실패도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그 어떤 삶도 열등하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내가 가진 자로서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못 가진 자와 실패한 자를“못난 놈”,“불행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내가 철저하게 비난하고 꾸짖는 대상은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 자기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서도 돈과 성공과 행복을 아주‘편안하게’꿈꾸는 사람들이다. )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반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면,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유형의 것이건 무형의 것이건 상관없이 그 양과 질이 증가하는 과정이 계속될 때 얻어진다. 미국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 David G. Myers) 역시‘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 : Discovering the Pathway to Fulfillment, Well-Being, and Enduring Personal Joy)에서 ‘고정된 고소득보다는 소득이 증가하는 상태가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소득의 많고 적음 그 자체가 아니라 소득이 매년 오르고 있을 때 인간은 행복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매년 연봉 백만 달러를 계속 받는 사람보다는 10만 달러의 연봉이 매년 증가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한 가지 더 붙이고 싶다.“사람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스스로 일으켜 그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신의 가치를 계속 증대시켜 나갈 때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말이다.

양귀자의 소설‘모순’에서 주인공인 25세 여성 안진진의 이모는 심심해하는 부유층 사모님이다. 돈도 잘 벌고 착실하기까지 한 멋쟁이 신사 남편을 둔 이모는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이 넘쳐 나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 잘 살던 이모가 너무나 행복한 일상에 지쳐 자살한다. 부자였지만 삶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이 종종 자살하는 이유 역시 삶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고 나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나의 미래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오판하고 그런 자살 시도를 하였었다.

토머스 제퍼슨은“행복의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했다. 그 권리를 누리려면 스스로의 변화를 먼저 주도하라. 남이 하면 따라 하고 남이 좋다면 따라서 좋다고 박수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뿌듯하여 질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찾아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은 이미 생명이 죽은 삶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에 익숙하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이 버는 돈의 액수가 작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당신이 돈을 얼마나 벌든 간에 삶에 변화가 없고 뿌듯함이 없다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키고 증가시키는 노력을 할 때 행복은 매일같이 주어지는 법이며 덤으로 뿌듯함 마저 느끼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그 변화의 방향을 어느 쪽에다 두는가에 있다. 그 방향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그 하나는 이 사회에서 대가를 더 많이 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변화를 줄 수 있는 지식들을 추구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회에서 대가를 받는 것과는 관련 없이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참선을 하면서 자기를 바라본다거나‘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생을 배운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돈과 관련되지 않은 것에 그 방향을 두고 있다면 당연히 돈은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변화가 주는 뿌듯함은 곧 돈 문제로 인하여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인들처럼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영위하며 살‘자신이 있다면’(사도 바울 같이 말이다) 계속 그렇게 돈과 거리를 두고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가치 있는 삶의 한 형태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대가를 더 받는 쪽에다 변화의 방향을 두고 있다면 그 대가 자체 보다는 변화의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 관심을 두어라. 그렇게 하면 행복감과 뿌듯함을 매일 맛 볼 수 있고 돈은 저만치에서 뒤따라오게 된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여 삶과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 언제나 나는 뿌듯함과 행복감에 충만하였다. 30대 초에 내가 컴퓨터와 씨름을 하다가 새벽 4시에 사무실을 나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던 집으로 가면서 어둠 속에서 느꼈던 그 가슴 뿌듯함을, 20대에 내가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새벽녘이 밝아오는 가운데 끝냈을 때 느꼈던 그 환희에 찬 뿌듯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돈? 돈은 그 뒤에서 성큼성큼 따라왔다.

비록 당신은 돈이 뒤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정말인가 의심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겠지만 내 말을 믿으라.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이미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변화가 싫다고? 지금 그 상태로 있는 게 좋고 행복하다고? 내가 알기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 무소유 신봉자, 신실한 신앙인 세 종류뿐이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변화 없이 사는 게 좋고 행복하다면 내게 그렇게 사는 비결 좀 알려다오. )

전쟁터에서 휴머니즘을 찾지 말라

20세기 말, 소말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였을 때 미 해병대가 파견되었다. 게릴라들은 주민들을 나무 십자가에 묶어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 총을 쏴 댔다. 미 해병대는 이런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그 결과 미군이 들어갔던 지역들은 모두 게릴라들이 석권하였고 그곳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한편 프랑스는 외인부대를 파견하였다. 외인부대는 자발적인 의사로 프랑스 정부와 계약을 맺고 군인이 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십자가에 주민들을 묶어놓고 그 뒤에 숨어 공격하는 게릴라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주민이고 뭐고 고려함이 없이 그냥 다 쏴 죽였다. 그리고 게릴라들은 적어도 외인부대에 대해서만큼은 자기들의 수법이 통하지 않음을 알았고 후퇴하였다. 그 결과 외인부대가 들어간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당신이 만일 작전 사령관이라고 하자. 어느 쪽 방법을 택할 것인가. 무고한 양민들 뒤에 숨은 적군을 살해하고자 그 양민들도 쏴 죽일 것인가. 아니면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후퇴할 것인가. 대부분의 전쟁 소설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은 무고한 양민을 죽이지는 못하여, 또는 적군조차 죽이지 못하여,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죽고 마는 사람이다(그 사람으로 인하여 부대 전체가 입게 되는 손실은 별로 묘사되지 않는다).

1898년 독일에서 출생한 레마르크의 소설‘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줄거리도 마찬가지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태풍 속에서 공습은 계속되고 폐허만 남은 세상에서 주인공 그래비와 운명적인 여인 엘리자벳은 찰나적인 사랑에 빠진다. 눈 덮인 러시아 전선에서 휴가를 받고 온 그에게 엘리자벳의 사랑은 존재의 이유가 될 정도로 강렬하다. 죽음의 거리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사랑은 인간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움과 동시에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다시금 부대로 복귀한 주인공 그래비는 엘리자벳이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자신이 살려준 빨치산에 의해 오히려 저격당해 허무하게 죽어간다. 가수 조성모의‘아시나요’뮤직 비디오에서는 군인 한명이 정글 속에서 베트콩을 경계하지 않고 나비를 구경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전쟁터에서 전쟁의 법칙을 무시하고 휴머니즘을 찾으면 당신이 죽는다.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려있던 미국의 인기 TV 프로그램‘서바이버(Survivor)’에서 참가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경쟁하게 된다. 각 팀은 매 단계마다 자기 팀의 참가자 중 한명을 축출해 버려야 한다. 최후의 승자는 그러한 경쟁과 축출을 통해 끝까지 남은 사람이 되게 된다. 때문에 상대팀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역할을 하게 될 팀원은 남겨두어야 하였지만 역으로 그 팀원이 나를 축출해 버리면 나는 패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아프리카 편을 보았다. 어느 한 팀에서 여자 환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그 환자를 돌보겠다고 약속한 팀원은 환자에게 음식을 준다는 미명하에 몰래 자기도 음식을 먹었다. 훔쳐 먹은 것이었다. 윤리적으로 볼 때 동료들을 속이고 나쁜 짓을 한 그 팀원이 당연히 제일 먼저 축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제일 먼저 축출된 사람은 여자 환자였다. 상대팀과의 경쟁에서 환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논리가 팀원들의 판단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매 단계마다 각 팀에서 축출된 사람은, 인간관계에만 치중한 사람과 개인적인 공로 혹은 명예만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최후에 승자가 된 사람은 동료들과의 동맹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새겨들어라!)

당신이 경쟁과 축출의 게임이 싫다면 이 게임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적군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군대에 가지 말고 대신 감옥살이를 하면 된다. 내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경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이 게임이 요구하는 차가운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휴머니즘을 찾는다는 것이다. 세계화 물결 속에서 이득을 추구하는 경제 전쟁은 더더욱 심화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어떤 휴머니즘 향기 그윽한 대안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경제 전쟁이라고 말을 하여도 시큰둥하게 듣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내 눈에는 지금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총탄들이 보이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떨어져 땅이 움푹움푹 푀이고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냉전 이후 더 이상 국가의 역할은 없으며 모든 사회적 문제는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데(사회적 평등과 책임을 전제하고 있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별된다) 신자유주의는 당연히 빈부격차와 인종갈등, 지역갈등을 그 어두운 그림자로 갖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그림자를 없애주고 살벌한 경제 전쟁을 종식시킬 앤소니 기든스의‘제3의 길’같은 것은 과연 있는 것일까? 파이낸셜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제3의 길을“유럽의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화려한 수식어”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제 3의 길이 있건 없건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길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길이 마련되기 전에 나는, 어쩌면 당신도 ,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 당신이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경제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변화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총체적 중산층 국가로 불리던 일본마저도 그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해 중류층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이 게임은 아주 지극히 단순하다. 이익을 누가 더 많이 낼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그것뿐이다. 그것 이외 고려하여야 할 다른 이데올로기는 없다. 지역 경제를 생각하거나, 정치적으로 특정 계층을 고려하거나, 기존 근로자들의 기득권이나 생존권에 신경을 쓰거나 하게 되면 그것은 곧 경쟁력 상실을 가져온다.

전쟁 중에 나비가 아름답다고 해서 구경하지 말라. 전쟁 중에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손을 내 밀지 말라. 전쟁 중에 하늘 노을이 아름답다고 해서 눈길을 보내지 말라. 그래야 총에 맞아죽지 않는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살아남으려면 휴머니즘이 아니라 손익계산서에서 이득이 나와야 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행동하여야 하느냐고? 그래야만 경제 게임에서 이길 수 있고 자본이라고 하는 힘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힘을 지니지 못한 자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외교관인 장 지로두가 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이 휴머니스트라면 경제 게임을 하지 않으면 된다. 축구팀에 농구 선수가 들어와서는 왜 손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징징대지 말고 돈 벌지 말라는 말이다.

야망을 갖지 말라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 누구나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들었을 것이다.‘꿈을 가져라’는 말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꿈이 있었기에 성공하였다는 수많은 위인들의 이야기도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이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역시 바로 그렇게‘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는가.

경영 컨설턴트 James Champy 와 하버드대 Nitin Nohria 교수 역시‘이루지 못할 야망은 없다’(원제 The Arc of Ambition; 청소년은 읽어라)에서 야망이나 꿈이 성공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나 넬슨 만델라, 월마트의 샘 월튼,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자동차 제조의 헨리포드,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CNN의 테드 터너 등등의 인물들이 야망을 일찍부터 품었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하였기에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들에서 감동을 받고 나름대로 꿈과 야망을 품는다.

꿈 깨라. 꿈을 갖고 야망만 품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가? 꿈과 야망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누구나 성공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데 왜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라는 말인가.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은 야무지고 원대하게 품지만 그 꿈을 실현시키는 아주 작은 단계들은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고자 하는 사람이 망원경으로 부산만 바라보면서 집 밖으로 나서는 첫 걸음들은 무의미하게 여기고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부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고 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나는 10년 안에 10억 원을 모으겠다’는 식의 꿈을 내게 피력한다(어떤 젊은이들은 한심하게도 100억 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꿈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소망에 지나지 않으며 너무 막연하다. 너무 원대하다. 당신은 어서 빨리 단번에 부자가 되고 싶은데 지금의 자기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거리가 멀고 그 꿈을 이룰 구체적인 방법도 없다. 그 결과 공상만 많아진다.‘아, 나한테 돈이 몇 억 있다면, 나한테 이러이러한 능력이 있다면 무엇 무엇을 해볼 텐데, 복권에 당첨되면 이런 걸 해볼 텐데.’

부자가 되고 싶다는 야망에 사로잡히면 일확천금만 꿈꾸게 된다. 절약을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당신은 현재 수입으로는 절약한다 하여도 백만장자가 되기에는 어림 반 푼어치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돈은 부자가 되는데 하등 도움이 안 될 것으로 여기고 미련 없이 다 소비하고 만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돈을 빚내서 쓰게 되고 모든 것을 신용카드에 의존하면서 빚을 메꿔 나가는 그러한 카드 인생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일확천금의 꿈이 당신을 오히려 도태시킨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나 야망은 버려라. 10년 후의 목표? 5년 후의 목표도 세우지 말라. 그 기간 동안 당신은 그만 지쳐버리고 만다. 그저 1년 정도 앞의 목표만을 세우되 1,000만원을 모으는 것 같은 소박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목표를 세워라. 그러한 목표가 정하여지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수입에서 얼마를 떼어내 얼마 동안이나 저축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계산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행동 지침이 당신 자신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일은 그 행동 지침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조만간 목돈을 쥐게 될 것이며, 바로 그 목돈이 종자돈이 되어 부자의 길로 접어드는 첫 계단에 올라 갈 수 있게 된다. (명심해라. 부자가 되는 게임의 첫 번째 승자는 누가 더 먼저 자기 몸값을 올리고 종자돈을 손에 쥐는가에 달려 있다.)

그 소박해 보이는 목돈이 손에 쥐어지게 될 시간이 언제가 될 것인지는 순전히 당신이 현재의 수입 가운데 얼마나 소비할 것이며 얼마나 저축할 것인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기간을 6개월로 만들려면 어쩌면 월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저축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간을 단축시키겠다면 그 길 밖에는 없으므로 그렇게 해라. 일단 , 6개월이건 1년이건 1년 미만의 가까운 미래에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절대, 절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 통장에 모인 돈을 뒤적거리며 안달하지도 말라. 그 모아진 돈을 부자가 되려는 꿈과 비교하고 계산하며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미래 투시 따위도 절대 하지 말아라. 몇 개월 치가 모였는지도 잊어버리고, 그저 다음 달에 저축하여야 할 돈만 생각하여라.

이것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백이면 백 모두 참고서의 앞부분만 새까맣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에 나온 부분을 지나 다음 부분에 가서는 다시 처음 부분을 들춰 보기 때문이다.‘내가 어제 그저께 공부 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가’ 하는 불안감에 지나간 부분을 들춰 보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당연히 상당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므로 오늘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지난 주 것을 복습하게 된다. 이러니 앞부분만 자꾸 반복하게 되어 앞부분의 페이지들만 새까맣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오다가 뒤를 돌아 본 롯의 아내처럼 소금 덩어리로 변하고 만다. 계속 전진만 하라. 앞을 바라보되 절대 저 높은 계단 꼭대기 위의 찬란한 태양빛을 성급히 찾지 말라. 오르페우스(Orfeus)처럼 에우리뒤케(Euridice)를 또 한 번 잃어버리게 될 뿐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오늘 지금 밟아야 할 계단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뿐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애니 기븐 선데이’(Any Given Sunday)는 프로 풋볼팀 마이애미 샤크스 안팎의 인물들이 벌이는 삶의 혼전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명작(내가 보기에는) 이다. 영화 속에서 토니 다마토(알 파치노)는 노장 코치다. 그의 팀은 3연패의 굴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내부적으로 팀은 분열되어 있다. 그들 앞에서 토니는 짧지만 감동적인 스피치를 한다.‘인생이나 풋볼이나 1인치 씩 앞으로 가는 것일 뿐이다. 그 1인치에 얼마나 최선을 하느냐에 따라 거기서 승리와 패배가 갈라진다. 승리와 패배의 차이는 결국 1인치의 차이이다. 우리는 오직 1인치를 위해 달릴 뿐이다.’

미래의 야망은 던져 버려라. 꿈과 야망은 성공의 원동력이 아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1인치 전진을 위하여 오늘 외롭게 최선을 다하는 힘이 바로 성공의 원동력이다.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 피터 샘프라스 역시 성공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결코 한 시합에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한 세트나 한 게임을 이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한 점만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나는 솔직히 샘프라스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지만 나 역시 그 사람처럼 하여 왔다. 당신도 그렇게 하라.

Life 와 Living

나는 인생을 Life와 Living으로 구분한다. 번역을 한다면 삶과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Living은 경제적 대가를 얻고자 시간을 투여하는 대상 혹은 그런 목적으로 일하는 시간 자체를 그 영역으로 갖는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건 없건, 그 대가가 많건 적건 간에 무료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생계를 의존하고 있다면 모조리 Living 에 속한다.

Life는 돈을 벌고자 하는 행위와는 관계없이 시간을 사용하는 영역이며 우정, 사랑, 희생, 보람, 가족, 자연 등이 그 중요 가치를 이루지만 게임이나 영화, 음악 등과 같이 자신이 재미있어 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것도 이 영역에 속할 수 있다. 다른 직업을 택하면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도 있는데도 적은 보수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Living 속에 Life가 깊이 스며든 경우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봉사나 보람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대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Life를 위장한 위선적인Living 에 불과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예술가들처럼 Life 와 Living 의 영역이 상당 부분 중복되는 경우들도 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그 두 영역이 분리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Living 을 Life 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당을 하는 사람에게 식당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히 Living 이 되겠지만 불우한 이웃을 위해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기도 한다면 그 일은 Life 도 되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인생은 이처럼 Living 속에서 Life 를 추구하며 그 구분이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Life는 Living 에서 얻은 돈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Living 이 나무의 뿌리와 줄기라면 Life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뿌리도 없이 Life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Living이 흔들리게 된다. 예컨대 하루에 10 시간씩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게 되면 건강한 몸을 갖게 되어 Life는 튼튼해 질 수 있겠지만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은 춥고 배가 고파질 것이다. 신앙을 자신의 최우선 Life로 생각하는 직장인이 교회에서 철야 예배를 보고 아침에 출근하여 일터에서 꾸벅 꾸벅 존다면 그의 Living 은 조만간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직장인이 공휴일 마다 가족과 함께 등산이나 낚시를 한다면 Life 는 튼튼할지 모르지만 Living을 Up Grade 시킬 시간을 투여하지 않기에 조만간 직장에서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수도사들처럼 Living을 거의 무시한 채로 Life 만을 중시하며 살 수도 있겠지만 한 가족의 가장이 기본적인 Living 마저 무시한 채 자신의 Life만을 찾고자 한다면 그 가족의 Living은 흔들리게 되고 결국은 가족의 Life 마저도 무너질 수가 있다.

반대로 Living을 중시하다가 Life가 흔들리는 경우도 있다. 택시회사에 고용되어 있었다가 개인택시 면허를 받아 독립하게 되면 자신이 버는 돈 모두가 자기 수입으로 잡히게 되어 처음에는 밥 먹는 시간도 아깝게 느낄 정도로 운전을 하며 돈을 벌고자 한다. 그러다가 몸이 쇠약해지면서 코피를 흘리게 되면 그때서야,‘아차, 돈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갖는다. Living 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건강이라는 Life 를 놓치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족의 가장이 자신의 바쁜 Living 을 핑계로 자녀에 대한 모든 문제는 아내에게만 맡겨 놓는 경우 역시 아버지로서의 Life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돈이 되는 환자들에만 매달리는 의사 혹은 수임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사건만 수임하는 변호사 같은 경우 Living은 성공적일 수 있으나 그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Life는 허약한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부자들의 경우는 어떨까? 대부분의 부자들은 예술가들처럼 Living에 속하는 일을 자신의 Life로 생각하며 살아 온 사람들이다. 일은 일상에서 그들이 최우선으로 삼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일하는 것을 그 어떤 가치 보다 우선시하며 즐겨왔다. 하지만 일 자체를 평생의 의무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직원들에게‘우리가 평생 일만 하여야 하는 일개미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강조하곤 했다. 천국이나 유토피아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은 못 들었다. 인간이 바라는 이상향은 기본적으로 무노동의 세계이다. 평생을 일만 하다가 일벌레로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면 나는 거부하겠다(죽을 때, 일을 더하고 싶다고 말하며 죽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일, 일, 일’하며 살았느냐고? 일을 효율적으로 남들 보다 더 잘 하게 되면 세상에서 받는 대가가 커진다. 그 받는 대가가 쌓여 부자가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일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된다. 즉 Living 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Life 가 가능하게 된다. 반대로, 젊어서 Life에 투자를 많이 하게 되면 중년 이후에는 Living 때문에 쩔쩔 매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우선은 Living 에 최선을 다하면서 30대가 끝나기 전에 Living 영역에서 뭔가 이룩해 놓고자 하였다. 즉 철저하게 우선순위를 Living 에 두었다. Living 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바빠진다.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문득 회의감이 찾아 올 것이다. Life와의 균형 문제로 인하여 갈등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이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면 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콜럼버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1493년’에서 콜럼버스의 아내는 남편에게 제발 돈 좀 벌어오라고 핀잔을 준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이렇게 대답한다.‘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만든다.’맞다. 이것은 웬만큼 부자가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부자가 되게 되면 한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로 만들어 준 구조체를 관리하여야 하기에 시간에 더더욱 쫓기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역시 그랬었지만 이미 지금은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 거미줄을 아주 크게 쳐 놓고 벌레도 많이 잡아 놓은 느긋한 왕거미이건 작디작은 거미줄을 쳐 놓고 한없이 벌레를 기다리는 작은 거미이건 간에, Living을 위한 거미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벌레가 많고 적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부자가 된 뒤의 Living 과 Life 사이의 균형 문제는 부자들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여야 할 문제이다. 문제는 부자가‘되려는’사람들이 생각하여야 할 균형과 불균형이다. 흔히 돈과 관련하여 사람을 평가할 때 아래 네 마디 중 하나를 사용한다.

돈도 없다. (Living도 Life도 신통치 않다) 돈은 없다. (Living은 신통치 않으나 Life는 좋다) 돈은 많다. (Living은 좋으나 Life는 신통치 않다) 돈도 많다. (Living도 좋고 Life도 좋다)

아마도 누구나‘돈도 많다’는 말을 듣고자 할 것이다. 내가 조언할 수 있는 것은, 부자가 되어가는 단계에서 만큼은 Living과 Life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완벽하게 잡으려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일단은 Living 에 신경을 쓰고 시간을 투자하라(이것을 나는 일용할 양식부터 먼저 구하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야 뿌리가 깊고 굵게 박히며 비바람이 쳐도 열매가 맺는다. 자신이 원하는 Life를 갖고자 한다면 우선은 Living 에 충실하면서 돈부터 모으라는 말이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가는 단계에서 Life 를 모조리 무시하지는 말아라. 최소한도는 해라. 기혼자라면 이를테면 배우자의 생일, 처음 만난 날, 결혼기념일만큼은 카드도 준비하고 꽃도 사고 촛불도 켜라.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애들이 아니라면 멀리 해라. 그래서 친구들이 핀잔을 주고 따돌림을 한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말아라. 부자가 되어가는 과정은 외로움을 이겨내는 과정이기도 함을 결코 잊지 마라. 어차피 당신 친구들 대다수는 평생 돈 걱정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라.

하지만 아무리 돈을 모으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도 비가 오면 때로는 비도 맞아 보고 맨발로 잔디를 밟기도 하여라.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삶도 종종 살펴보아라. 자신이 왜 부자가 되려는 지를 정확히 되새기는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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