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스티브 잡스

謹弔… 2011년 10월 5일 스티브 잡스 옹 사망… ㅠㅠ

21살에 애플을 창업한 잡스는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1985년 쫓겨났다가 1) 12년 뒤 복귀한 이후2) 혁신적인 컴퓨터와 휴대폰, 모바일기기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시가총액 1위 였던 엑손을 제치기도 하는 등 애플을 가치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3)

그러던 중 잡스는 지난 2003년 췌신경세포암 (Insulinoma), 2004년 췌장암 수술과 2009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으며 2011년 1월에는 3번째 병가를 냈다.

잡스는 2011년 8월 24일 건강상 이유로 애플의 CEO직을 사임했고 iPhone4S (iPhone for Steave) 발표 다음날, 퇴임 2개월 만에 사망했다. t_hero.png

자세한

스티브 잡스 관련 서적 (예스24)

http://allaboutstevejobs.com/

사망 전 4년치 신제품 계획 수립...

죽기 전날도 차기 제품에 대한 이야기

애플 이사회의 성명 전문

스티브 잡스가 별세했다고 전하게 돼 마음이 무척 무겁다.
잡스의 명석함과 열정, 에너지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 무한한 혁신의 원동력이었다.
세상은 잡스 덕분에 헤어랄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그는 아내인 로린과 가족을 가장 사랑했다. 그의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놀라운 유산에 감사를 보낸다.
잡스 옹 추모 페이지 http://www.apple.com/stevejobs/

오바마 대통령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발명품을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는 사실보다 잡스에 대한 더욱 큰 헌사는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월터모스버그- 월터모스버그-내가-기억하는-잡스

ps.. 죽을 땐 어떤 후회를 할까?

내가 왜 울컥.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문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문

오늘 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의 한 곳을 졸업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이 내가 대학졸업식이라는 데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우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내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그저 세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이야기

첫번째 얘기는 점(點)을 잇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리드 대학이라는 곳을 첫 6개월 다닌 후 그만 두었습니다. 그후 18개월 동안은 비정규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진짜로 그만두었습니다. 내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이 얘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나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4) 생모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되어있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입양키로 한 부부는 마음을 바꿔, 자신들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생모는 한밤중에 입양대기자 명단에 있는 다른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생모는 나중에야 내 어머니(양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내 아버지(양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생모는 이 때문에 최종적인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달 후 내 양부모가 나를 나중에 대학에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나는 정말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였던 내 부모(양부모)는 저축한 모든 돈을 내 대학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후 나는 그만한 돈을 쓰는 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내 부모들은 전 인생을 통해 저축해놓은 모든 돈을 내 학비를 위해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 그런 결정은 다소 두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한 가장 훌륭한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순간, 나는 내게는 흥미가 없었던 필수과목을 들을 이유가 없어졌고, 내게 흥미롭게 보이는 다른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낭만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나는 기숙사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방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음식을 사기위해 되돌려주면 5센트를 주는 콜라병을 모으는 일을 했고,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일요일밤마다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나는 그걸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가다가 부딪힌 것들 중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들로 나타났습니다.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이겠습니다.

내가 다녔던 리드대학은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서예 교육 기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전체를 통해 모든 포스터, 모든 표지물들은 손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글씨체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정규과목들을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배워 보려고 서체과목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알아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나에겐 이런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실제로 응용될 것이란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되살아 났습니다.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대학의 그 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맥 컴퓨터는 결코 다양한 서체를 가진 컴퓨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원도즈는 맥 컴퓨터를 단지 베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맥 컴퓨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정규과목을 그만두지 않았고, 서체과목에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과 같은 놀라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잇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들에–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나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내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나의 두번째 이야기

나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의 이른 시기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행운을 가졌습니다. 우즈(스티브 우즈니액, 애플 공동창업자)와 나는 애플을 우리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스무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10년이 지난후 애플은, 우리 둘만의 차고에서 20억 달러에다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인 맥킨토시 컴퓨터를 1년 빨리 시장에 출시했는데 그 때 나는 막 서른 살이 될 때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느냐구요? 글쎄, 애플이 커가면서 우리는 회사를 운영할 어떤 사람을 고용했고 첫해는 그럭저럭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서른 살이었던 나는 쫓겨났습니다. 성인으로서 내 삶의 초점이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나는 참혹함에 빠졌습니다. 첫 몇달동안 나는 무엇을 할지 정말 몰랐습니다. 나는 앞서의 기업가 세대는 물러나게 된다는 어떤 느낌, 지휘봉을, 내게 전해진 것처럼 그렇게 내려놓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나는 데이비드 팩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났고 그들을 그렇게 못살게 군 데 대해 사과했습니다. 나는 아주 공식적인 실패자였습니다. 실리콘 밸리로부터 도망쳐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내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에서의 일이 그것을 조금도 바꾸진 않았습니다. 나는 거부당했지만, 여진히 내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중 최고의 경우였습니다. 성공에 대한 부담은, 모든 것에 확신은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벼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이후 5년동안 나는 NeXT라는 회사, Pixar5)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시작했고, 나중 내 처가 된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놀라운 반전 속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나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린과 나는 함께 한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두려운 시험약이었지만, 환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나를 이끌어간 유일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에서 처럼,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나는 이런 비슷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여러날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는 것으로 이어질 때, 나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내 삶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모든 자부심, 모든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거의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벌거숭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약 1년 전 나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는 아침 7시30분에 스캔을 받았는데, 췌장에 분명한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췌장이라는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 거의 확실하다면서 내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내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의사들이 말하는 죽음의 준비입니다. 그것은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진단을 하루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나는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넣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몇점의 세포를 췌장에서 떼어내 조사를 했는데, 의사들은 놀랍게도 나의 경우 매우 드물게도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췌장암임이 밝혀졌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아 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몇십년간은 그렇기를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유용하긴 하지만 지적 개념만으로 알고 있었던 때보다는 좀 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천국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조차 거기에 가기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목적지 입니다.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가장 훌륭한 창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교체를 만들어 내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낡음을 청소하고 새로움을 위한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 이순간, 그 새로움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날,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을 그때, 여러분들도 점차 낡음이 되고 청소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통념, 즉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 "전세계 목록"이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 그 책은 바이블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튜워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그는 시적인 면들을 가미해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게 1960년대로,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도 데스크탑 출판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타이프라이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번 개정했고, 결국 그 책의 역할을 다 했을 때 최종판을 내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내가 여러분의 나이 때입니다. 그 최종판의 뒷표지에는, 여러분이 탐험여행을 하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타기 위해 손을 드는 곳과 같은, 이른 아침 시골길을 찍은 사진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계속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 (Stay Hungry. Stay Foolish) 이것이, 그들이 책을 더이상 찍지 않기로 하면서 한 작별의 메시지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이러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감사합니다.

잡스, CEO 사퇴…서한 전문

[머니투데이 권다희기자]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CEO직을 사퇴한다고 24일 밤(현지시간) 밝혔다.

잡스는 이날 임직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CEO 사퇴의사와 차기 CEO로는 팀 쿡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명한다고 밝혔다.

병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들어있지 않았다.

다음은 잡스가 애플 임직원들에게 보낸 서한 전문.

애플 이사회와 직원들에게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책임과 기대에 더 이상 부응하기 힘들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항상 말해 왔는데
불행히도 그 날이 왔습니다.
이로써 나는 애플의 CEO 직에서 물러납니다. 이사회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 회장직과 애플 구성원으로 남고 싶습니다.
차기 CEO에 관해서는, 우리의 후임자 계획을 실행하고 팀 쿡을 차기 CEO로 임명하길 강력하게 권합니다.
애플은 가장 밝고 혁신적인 날들을 앞두고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자리에서 애플의 성공을 보며 이에 공헌하기를 고대합니다.
애플에서 내 평생의 가장 귀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당신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많은 날들에 감사를 전합니다.
"행복이 가득한 꿈바구니"

http://news.kbs.co.kr/world/2011/08/26/2346426.html

연혁

<토이스토리>의 성공과 함께 하드웨어 위주의 사업가였던 스티브 잡스에게 대중문화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기술과 기계 안에 대중을 기쁘게 하는 문화와 콘텐츠의 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생, 같은 해 잡스 부부에게 입양
  •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 설립
  • 1977년 개인용 컴퓨터 애플Ⅱ 출시
  • 1978년 전 여자친구 사이에서 딸 리사 출생
  • 1983년 마우스로 작동되는 컴퓨터 리사 컴퓨터 출시
  • 1984년 매킨토시 출시
  • 1985년 이사회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남
  • 1985년 넥스트 설립
  • 1986년 루카스필름으로부터 1,000만 달러에 픽사 인수
  • 1991년 로렌 포월과 결혼
  • 1995년 [토이스토리] 개봉
  • 1996년 애플에 넥스트 매각
  • 1997년 애플 최고경영자로 복귀
  • 1998년 아이맥 출시, 애플 흑자 전환
  • 2001년 아이팟 출시
  • 2004년 디즈니에 픽사 매각
  •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
  • 2007년 아이폰 발표
  • 2009년 간이식 수술
  • 2010년 아이패드 발표
  • 2011년 애플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남
  • 2011년 10월 5일, 사망

가정사

잡스는 고교시절부터 동거하던 여자친구 크리스 앤과의 사이에서, 1978년 딸 ‘리사’를 낳았다. 하지만 23세의 잡스는 리사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양육비조차 주지 않아 미혼모인 앤이 정부보조금을 받아 근근이 아이를 키웠다. 10년 뒤 리사가 성장하고 친자 확인 소송이 제기되고 나서야 그를 자신의 딸로 리사를 받아들였다. 그는 1991년 로렌 파웰과 결혼했다. 자녀는 리사를 포함해 모두 4명. ‘나쁜 남자’였던 잡스는 정식으로 가족을 이루면서 점점 가정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그는 전설적 컴퓨터 ‘매킨토시’를 출시하기 전 딸 리사의 이름을 딴 ‘애플 리사’를 출시했다. 비록 이 모델은 잡스 생애 최고의 실패작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에게 화해의 메시지 전달을 제대로 전달하게 된 셈이었다.

가구 없는 생활로 여자친구에게 퇴짜 = 1980년대 초반 스티브 잡스는 그래픽 디자이너인 티나란 여성과 동거했다. 티나는 양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충격에 빠진 잡스를 위로한 인물이있다. 때문에 잡스는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으며 결혼까지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티나는 잡스의 독특한 생활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잡스가 살던 집은 침대 등의 가구가 하나도 없는 독특한 집이었다. 잡스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잡스는 완벽한 것을 사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무엇을 살지조차 결정하지 못했고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독신 남성 잡스는 겨우 매트리스 하나만을 놓고 살았다. 백만장자였음에도 수년간 침대에서 자지 않은 것이다. 티나는 잡스와 동거하는 도중 ‘가구 하나 없는 집에 적응할 수 없다’고 불평을 자주 했으며 1년이 지나도록 잡스가 가구를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자 아예 집을 나가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압둘 잔달리는 1931년 시리아에서 태어났다. 압둘 잔달리의 아버지는 정식 교육은 받지 아니하였지만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된 사람으로서 자식들에게 최선의 교육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원하였다. 알둘 잔달리는 18세에 베이투트에 있는 유명한 대학인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을 다니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하던 죠지 하바스 등의 인물과 어울려 같이 아랍 민족주의에 관한 잡지도 편찬하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다마스커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시리아에 이미 변호사가 많다고 반대를 하였다. 그리하여 UN에 파견되어 있는 외교관인 친척의 도움을 받아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 공부를 한 후 위스컨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법철학과 정치학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압둘 잔달리는 위스컨신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같은 학교에 재학중인 스티브 잡스의 생모인 "죠안 캐롤 쉬블(Joanne Carole Sciebele)"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죠안은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독일계로서 독실한 기독교인인 쉬블의 아버지가 완고하여 아랍인이고 회교를 믿는 잔달리와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절대적으로 반대하였다.

좌절한 죠안 쉬블은 자기 아버지나 압둘 잔달리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좀 더 개방적인 샌프란시스코로 혼자 여행을 가서 1955년 아들을 낳고 입양을 부탁한다. 처음에 변호사 가정에서 입양할 예정이었으나 그 집안에서 여자 아기를 원하여 좌절된다. 그래서 결혼 후 10년간 아기를 갖지 못하여 입양을 원하던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된다.

잡스 부부가 대학을 나오지 아니한 것을 발견한 쉬블은 향후 아들을 대학교육을 시킨다는 서약을 받고 입양시킨다. 폴 잡스는 해군 제대 후 레이저를 만드는 회사에서 기계공으로 일하고 있었고 클라라 잡스는 회계 관련 일을 하였다. 클라라 잡스는 윈래 소련과 이란의 접경에 있는 아르메니아 출신이었다.

그런데 죠안 쉬블이 아들을 입양시킨 후 얼마 안되어서 쉬블의 완고한 아버지가 사망을 하여 쉬블과 잔달리는 결혼을 하고 스티브 잡스의 생물학적 여동생인 모나 잔달리를 1957년 낳게 된다. 만약 쉬블의 아버지가 조금만 일찍 사망하였다면 스티브 잡스는 양부모가 아닌 친부모 슬하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압둘 잔달리는 박사학위를 받고 자신의 국가인 시리아에서 정치척 활동을 할 꿈을 가지고 모국으로 돌아 간다. 그러나 시리아로 가서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 죠안 쉬블은 1962년 압둘 잔달리와 이혼을 한다. 그리고 죠안 쉬블이 심슨이라는 남자와 재혼하면서 딸의 이름을 "모나 심슨"으로 개명을 한다.

알둘 잔달리는 당시 아랍 연맹에 속한 시리아에 가서 정치활동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이 득세하는 가운데에 그러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 오게 된다. 그 후 미국에서 미시간대 조교수를 거쳐 네바다 대학에서 정치학과 교수를 하다가 나중에 네바다주에서 음식과 카지노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알둘 잔달리는 그 이후 두번 더 재혼을 하였으나 재혼에서 더 아이를 가지지는 아니하였다.

스티브 잡스에 입양에 대해 직접 관여하지 아니한 압둘 잔달리는 죠안 쉬블과 이혼 후 자신의 친 아들에 대해 잊고 지내다가 스티브 잡스가 유명하여 진 이후에 그가 친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알둘 잔달리는 스티브 잡스에게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밝히지 아니하고 평범한 안부 이메일을 몇 번 보내었으나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암 증세가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언론의 인터뷰를 통하여 자신의 친아들과 커피 한잔을 마셨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스티브 잡스가 임종한 것이다.

© 1987 Thomas Victor. Courtesy Knopf.

스티브 잡스의 생물학적 여동생인 "모나 심슨"의 이야기로 돌아와 본다. 그녀는 버클리에서 영문학 학사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모험심 많은 모녀간의 갈등을 다룬 "Anywhere But Here"라는 그녀의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1999년 수잔 새런든이 주연을 맡아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아래 링크로 그 영화의 예고편을 볼 수 있다. http://www.imdb.com/title/tt0149691/

모나 심슨은 위 소설을 자신의 생모와 자신의 생물학적 오빠인 스티브 잡스에게 헌정한다고 발표하였고, 1988년 스티브 잡스와 모나 심슨은 직접 만나게 된 후 서로가 남매로서 닮은 점이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위 사진을 보면 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모나 심슨을 만나고 나서 생부모 가족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고 생모인 죠안 심슨도 수차례 만났으나 생부인 압둘 잔달리는 평생 만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모나 심슨은 압둘라 잔달리와 연락을 계속 하여 성인이 된 후 생부의 도움으로 시리아에 다녀 온 적도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시리아 혈통을 생각하고 이름을 원래대로 "모나 잔달리"로 바꾸는 것까지도 고려하였다고 한다.(http://bombsite.com/issues/20/articles/947 잡지 인터뷰 참조) 다만 "모나"라는 이름 자체도 아랍에서 흔한 여자 이름이라고 한다.

심슨은 그 후에도 여러 편의 소설을 더 쓰고 현재 UCLA 영문과 교수로 있다. 그녀는 1993년 TV작가 이면서 프로듀서인 "리차드 아펠"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나 나중에 이혼을 하였다. 아펠은 위 사진에 나오는 유명한 TV 시리즈인 "심슨 가족"을 제작하였다. 그런데 그 주인공인 호머 심슨의 어머니 이름을 자기 처 이름인 '모나 심슨"으로 하였다.

이제 스티브 잡스, 모나 심슨, 압둘 잔달리 3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보면 스티브 잡스는 생부인 압둘라 잔달리의 존재를 모나 심슨으로부터 들었으면서도 전혀 만나려 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압둘라 잔달리의 경우도 올해 언론을 통한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친자식을 만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 이유를 양부모에 대한 존중 및 시리아 사람의 자존심으로 돌리고 있다. 입양되지 아니한 딸인 모나 심슨과 계속 연락을 취한 것을 보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가 평범하나 관용적이고 전자제품에 관한 호기심을 주는 가정에 입양된 것이 그의 잠재적인 능력을 키위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의 선천적인 지적능력 및 공격적인 일벌레 성격은 평범한 양부모 보다는 생부에서 온 것이 아닐가하고 생각한다.

잡스와 빌

말들

◆ 애플을 창업한 직후

“나머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꿔놓을 기회를 갖고 싶습니까?”(1980년 애플에 당시 최고 마케팅 실력자였던 존 스컬리 펩시콜라 사장을 영입하기 위해 한 말)

“웰컴, IBM.” (1981년 애플을 겨낭해 컴퓨터 공룡 IBM이 PC 시장에 진출하자)

“우리는 우리의 비전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는 편이 ‘미투(me too)’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제품은 다른 회사들이나 만들면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다음의 꿈’입니다.” (1984년 매킨토시 발표할 당시 잡스가 인터뷰 중에 한 말)

◆ 애플에서 쫓겨난 후

“나는 언제나 애플과 연결돼 있을 겁니다. 내가 희망하는 건 오직 하나, 내 인생이 하나의 실이라면 애플과 엮여 짜여져 있었으면 하는 겁니다. 내가 애플에 없을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애플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났을 때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무덤에서 이 나라 최고 부자가 되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우리는 정말 놀랄만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중요합니다.” (1993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 애플에 다시 복귀한 후

“위대한 제품을 만듭시다. 사람들이 응답해줄 것입니다.” (1997년 애플에서 쫓겨난 지 12년만에 애플 CEO로 복귀하며)

“끊임없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언제나 실패의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1998년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 아이팟, 아이폰을 출시한 후

“혁신이야말로 누가 리더인지 누가 모방자인지 분명히 구별시켜줍니다.” (2001년 mp3 플레이어 아이팟을 소개하며)

“델, 당신은 틀렸어.” (2004년 애플 시총이 델 시총을 넘어서자 차라리 회사를 파산시키는 편이 낫다며 자신의 애플 복귀를 폄하했던 델 CEO를 향해)

“항상 배고파하십시오. 늘 바보스럽게 우직하게 살아가십시오.” (2005년 6월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장 연설)

“지금 당장은 위험한 것 같지만 그것은 언제나 좋은 징조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다른 측면에서 꿰뚫어볼 수 있다면 큰 성공을 이뤄낼 수 있을 겁니다.” (2007년 D5콘퍼런스에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당신은 다른 일, 뭔가 멋지고 놀랄만한 일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일에 오래 머무르지 마십시오. 다음 번에 어떤 일이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NBC 뉴스, 2006년)

“혁명적인 제품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2007년 아이폰 1세대 모델을 소개하며)

“우리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실수를 합니다. 우리는 실수를 빨리 알아내죠.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고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최고의 회사가 된 이유입니다.” (2010년 신형 아이폰 발표회장에서)

제품

애플의 10가지 핵심 제품은 IT 업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 제품을 소개한다.

▶애플 Ⅰ(1976년)=애플이 내놓은 첫 컴퓨터 제품으로 생산 대수는 많지 않았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디자인하고 잡스가 자금을 모으고 마케팅을 맡았다.

▶애플 Ⅱ(1977년)=최초로 성공한 개인용 컴퓨터 가운데 하나로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애플1에 이어 스티브위즈니악이 설계를 담당했으며, 수 차례 업그레이드를 거쳐 1993년 11월까지 생산됐다.

▶리사 (1983년)=잡스가 제록스사 연구소를 방문하고 나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첫 번째 상업용 컴퓨터. 마우스로 작동되는 아이콘, 윈도, 커서 등이 장착된 그래픽 사용자 환경을 갖췄으며 오늘날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기반이 된 제품이다. 그러나 높은 가격 탓에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스티브 워즈니악은 과거 스티브 잡스가 자신과 함께 공동으로 일을 하고 받은 돈 중 대부분을 가로챘다는 걸 알고 분노했고, 스티브 잡스는 사과 대신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없었던 일이야”라며 부정했다. 스티브 잡스에게 진저리치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는 자신의 딸 이름을 쓴 컴퓨터 사업에서 밀려나게 됐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매킨토시 (1984년)=리사와 마찬가지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췄다. 가격이 싸고 속도가 빠른데다 제품 광고도 대량으로 실시했다. 특히 매킨토시는 레이저 프린팅 기능을 지원하면서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활용됐다. 기술적인 면까지 일일이 관여하며 심지어 부하직원이 주목받는 게 싫어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망치려고 했고, 직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앞에서는 거부한 뒤 얼마 후 돌아와 자신의 아이디어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넥스트 컴퓨터 (1989년)=애플에서 물러난 잡스는 강력한 워크스테이션 컴퓨터를 제조사를 만들었다. 넥스트 컴퓨터는 많은 대수를 판매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최초의 웹브라우저를 만드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맥 OS X와 아이폰의 iOS도 이 컴퓨터의 플랫폼을 토대로 탄생했다. 여전히 성능과 디자인에만 집중, 소비자 입장은 고려하지 않았다. 넥스트 큐브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발표됐고, 또 망했다.

▶아이맥 (1998년)=아이맥은 잡스가 임시 CEO(interim CEO) 복귀하고 애플의 하락을 반전시킨 첫 제품이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15개이던 애플의 제품군을 ‘일반용/전문가용, 노트북/데스크북’으로 단순화 시켰다. 아이맥은 전 세계에서 인터넷의 이점에 눈을 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로 떠올랐다. 이후 잡스는 컴퓨터를 경량화 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맥북에어: 봉투에 넣을 수 있는 얇은 노트북. 무대 위에서 직접 맥북에어를 봉투에서 꺼낸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찍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나의 쇼로 인식했던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 발표 당시에도 매킨토시를 자루에서 꺼내는 쇼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 프레젠테이션이 매킨토시의 신기한 기능을 전달하는 화려한 쇼에 가까웠다면, 복귀 후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이해하기 쉬운 한 줄의 문장, 소비자 입장에서의 효용성 강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애플은 업그레이드 된 제품을 지난 버전과 같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애플 II 시절부터 구형 모델에 대한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실시한다. A/S까지도 자신이 정해놓은 방식을 따라야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 하지만 기어이 사용자들이 좋아할 방법을 찾겠다는 집념. 독선적이면서도 세상과의 소통 법을 기막히게 잘 아는 사람이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배타적인 기계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이팟 (2001년)=하드 드라이버를 갖춘 최초의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그 분야에서 성공한 최초의 모델. 휴대용 전자기기로의 애플의 사업 확장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아이팟의 성공으로 아이튠스 음악스토어와 아이폰이 잇따라 출시됐다.

▶아이튠스 스토어(2003년)=디지털음원을 거래할 수 있는 온라인상점 아이튠스 스토어는 대형 음반사의 음원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어 이용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아이튠스 스토어는 2008년 미국의 최대 음반 판매점으로 등극했다.

▶아이폰 (2007년)=매킨토시의 장점을 휴대전화에 적용한 아이폰은 출시되자마자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를 뒤바꿨다. 멀티터치기반의 사용자 환경이 보급됐고 이는 스마트폰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아이폰을 통해 애플은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는 기업이 됐다.

▶아이패드 (2010년)=아이패드가 등장하기 전까지 많은 기업들이 태블릿PC 시장에서 도전했다가 쓴잔을 삼켰다. 하지만 아이패드가 성공을 거두면서 태블릿 시장은 IT 기업들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태블릿이 노트북 시장의 점유율까지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사진

97751_87578_1441.jpg 일본을 방문했다가 평직원들의 유니폼을 보고 느낀 것이 있어 애플사 직원들에게 제복을 입히려 했으나 실패한 후 (미국에서 될리가!) 자신은 같은 옷만 입었다는 전설. 아침에 무엇을 입을 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일에만 열중할 수 있다라고 했다능. 06_44893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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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4월 24일 애플II의 새로운 모델을 소개하고 있는 스티브 잡스(왼쪽)과 존 스컬리 당시 애플 CEO(가운데), 스티브 워즈니악(오른쪽) ⓒAP=연합뉴스

'1984' 매킨토시와 함께 발표된 TV광고. 당시 커다란 반향을 불렀다.

2011100610092896656_2.jpg 넥스트 컴퓨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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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인 2000년 9월 13일스티브 잡스가 애플 컴퓨터를 시연하고 있다. (사진=AFP)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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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28일 스티브 잡스가애플 아이튠을 공개하고 있다. 잡스는 2004년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사진=AFP)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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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일 스티브 잡스가 애플 TV를 공개하고 있다. (사진=AFP)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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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6일 스티브 잡스가 애플 아이클라우드를 프리젠테이션 하고 있다. (사진=AFP) News1

2011년 8월 28일 스티브 잡스가애플 최고경영자(CEO)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로 병마에 몸이 앙상하게 말라 친구의 부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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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0075158_4e8fef0c38e03.jpg 잡스는 이미 신. f0075158_4e8feeff834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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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타임지 표지

1)
자신이 펩시콜라에서 직접 영입했던 존 스컬리의 '친위쿠데타'로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난 것. 잡스는 스컬리를 영입하면서 "남은 기간 평생 설탕물을 팔다가 보낼 거냐? 아니면 세계를 변화시킬 기회를 잡을 거냐?"는 말을 했던 건 유명한 일화로 꼽히고 있다. 쫓겨난 이후 5년 동안 조지 루카스가 운영하던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인수하고‘넥스트’를 설립했지만 하루 아침에 회사가 문을 닫을 상황까지 몰렸다. 픽사가 만든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재기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와 함께 1996년 추락을 거듭하던 애플은 잡스를 다시 불러들였다.
2)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났다가 1997년 임시 최고경영자(CEO)로 복귀한 잡스는 오자마자 신제품 관련 부서를 순시한 뒤 진행 중이던 제품 개발 계획을 대부분 폐기했다. 항의가 빗발치자 잡스는 “다르게 생각하라.”라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것이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으로 이어진 혁신의 출발점이었다.
3)
잡스는 특히 1977년 애플컴퓨터Ⅱ로 PC시대를 열어젖힌 후 30여년 만에 태블릿PC 아이패드를 내놓음으로써 PC시대를 접고 포스트PC를 주도해 세계 역사를 스스로 개척하고 주도했다는 평이다.
4)
1955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리아계 아버지 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양가 부모의 반대로 1주일만에 입양됐다. 하지만 수개월 후 잡스 생모의 아버지(잡스의 외할아버지)가 사망했고 잡스의 생모와 생부는 결혼하여 딸 ( 모나 심슨 )을 낳았다.
5)
디즈니사로 합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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