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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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강제 집단 죽음'

오키나와의 비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강제 집단 죽음'이다. 이제 80대의 노인이 된 당시 생존자의 증언은 당시의 만행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강제 집단 죽음'이 발생한 1945년 3월말 당시 고교 2년생이었던 긴조 시게아키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 비극을 증언하는 긴조 시게아키 씨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후에 일본군들과 동사무소 직원들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습니다. 그것은 자결 명령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수류탄의 폭음과 비명, 통곡 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철저하게 황민화 교육을 받았던 오키나와 주민들은 '군관민 공생공사(軍官民 共生共死)', 즉 '군인도 공무원도 주민도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는 정신을 강요받았다. 또한 일제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가랑이 찢겨 죽고, 여자는 능욕을 당한 후에 죽는다'며 미국을 악마화했다. 비참한 꼴을 당하느니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긴조 시게아키 씨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불발탄이 많았던 탓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과 죽창을 들고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형과 함께 어머니를 돌로 내리쳤고, 여동생과 남동생도 때려 죽였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청년이 외쳤습니다. '이대로 죽느니 미군을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 그런데 저를 포함해 5명의 청년들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군관민 공생공사'라고 했는데, 일본군은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히메유리 평화기념 자료관에는 또 하나의 비극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계시한 1945년 3월 23일, 일본군은 여고생 222명과 교사 18명을 동원해 오키나와 남부의 한 육군 병원에 배속시켰다. 일본군이 패퇴를 거듭해 남부로 쫓기자 이들도 일본군을 따라 남하하면서 치료와 간호, 그리고 식사와 시신 처리를 맡았다.

그리고 오키나와 전체가 미군의 수중에 떨어진 6월 18일 일본군은 '해산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해산 명령에 당황한 여고생들과 교사들은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포탄에 맞아 죽거나, 일본군이 나눠준 수류탄으로 '자결'을 선택했다. 그들의 뇌리에는 '미군에게 잡히면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일본군의 말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40명 가운데 생존자는 10여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증언을 해준 사람들은 일본군에게 '악귀'라고 각인된 미군에게 잡혔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미군이 일본 본토 상륙에 앞서 오키나와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동원해 곳곳에 비행장과 참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이 가공할 공습과 함께 오키나와를 신속히 점령해나가자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악귀에게 죽느니 자결을 선택하라'며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미군의 포로가 되면 군사기밀을 알려줄 우려가 있다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탓이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 정부는 역사 왜곡이라는 또 다른 만행으로 오키나와 주민들을 분개시키고 있다. 5년 전까지 교과서에 '강제 집단 죽음'이라고 기술되었던 표현을 '집단 자결'로 바꿔버린 것이다. 천황과 군대에 의한 '강요된 죽음'이 아니라 천황을 위해 자발적으로 집단 자결했다는 것이다. 분개한 오키나와 주민들은 도쿄로 상경해 항의 집회를 하고 수만명이 나하시에 모여 집회를 해도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 출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010100146&section=05&t1=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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