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Okinawa

오키나와 沖縄/충승(류큐어 うちなあ 또는 바다 앞에 친 줄에서 유래)

류큐 제도를 관할하는 일본의 최남단의 현.

현청은 오키나와시(市) 주) 이전부터 있던 지명이 아니라, 1974년에 기존의 고자시(コザ市)와 미사토손(美里村)의 합병으로 생긴 도시이다. 명명 당시 나하시의 반발이 있었다고. 유사하게 행정구역 합병 등으로 사후에 현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된 도시는 사이타마시 (이 쪽은 현청소재지이지만 원래 사이타마의 유래와는 무관) 나 야마가타시 등이 있다. ]]가 아닌 나하시(市)에 있다(원래 류큐 왕국의 중심지는 나하 일대였다). 현지사는 나카이 마히로카즈(仲井眞弘多 주)1 이름 앞에 '마(眞)'를 붙이는 것은 류큐인의 관습이라고 한다.《곤코켄슈(混效驗集)》라는 류큐 고어(古語) 사전등에도 이러한 용법이 나온다]])이다.

행정 구역

류큐 처분 및 일본으로의 편입

오키나와 현의 역사는 일본이 1879년 이른바 '류큐 처분'을 통해 당시 이미 왕국에서 번으로 강등된 류큐 정부를 해산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정부를 해산하고 국왕을 도쿄로 압송해 형식적 작위(후작)를 내린 뒤, 이 일대에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였다.

이후 식민지 동화 정책을 거치면서 류큐는 매우 안 좋은 신세로 전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공황기에는 경제 및 식량사정의 악화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소테츠' 주)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소철'이다. 잎과 열매에 독이 있어서 처음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라고 불린 풀로 연명해야 했다. 1930~40년대 빈궁한 조선인들이 나무껍질까지 먹었다고 한 바와 비슷하다. 즉 류큐 제도와 오키나와 전체는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식민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후 타이완조선까지 차례로 일본 식민지가 되면서 오키나와는 대우가 점점 안 좋아졌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있었던 관동 대지진에서도 조선인, 중국인과 함께 류큐인들이 학살당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일본 정부, 가고시마(식민지배를 시작한 사쓰마번)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나쁜 편이며, 반감도 강한 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오키나와는 다시 주목받았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이곳을 병참 기지로 쓰기 시작했던 것(이곳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군의 집결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패전이 다가오면서 미군이 오키나와에도 상륙하게 되는대, 이오지마전투와 더불어서 태평양 전선 최대의 혈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 와중에 일본은 자국민 보호는 커녕 오키나와 주민 전원에게 옥쇄하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은 또 이것도 충실하게 수행해서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투중에 인간방패로 쓰거나, 패배가 다가오자 주민들을 모아놓고 자폭(말이 좋아서 자폭이지, 살고싶어하는 민간인들까지 살해했다.) 하기까지 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때까지 최소 20만명의 오키나와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도 많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는 평이 많은데,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로 보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그냥 단순한 식민지인 오키나와의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야기. 본문의 후반부에 다시 언급되는 전쟁종료 막후 협상에서 일본측의 최후 협박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 오키나와보다 더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의미로. 그리고 여기에 미국은 핵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트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런 사례들로 인해 오키나와는 특히 제2차대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고, 일본 본토에 대한 감정도 이전보다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노인과 여자들은 보호는 커녕 옥쇄라는 미명하에 끌고가서 자폭시키고. 어린 남학생들은 데려다 군인으로 써먹고, 여학생들은 데려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히메유리 학도대가 있다.

1945년 6월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조선처럼 이 지역을 일본에서 떼어놓기 위해 류큐 정부를 세웠다(그러나 실상은 미국령이라…).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세를 잡아 버리고(1949), 급기야 북한한국전쟁이라는 병크를 터뜨리는 바람에(1950) 미국의 류큐 독립 정책은 흑역사가 되어버렸고, 미국은 일본과 함께 애치슨 라인에 이 지역을 집어넣으면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군사 기지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2차대전부터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이후 동북아시아 미군의 거점이 된다. 오키나와 반환 및 미일안보조약에 관한 미국 내부 협의에서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고 이를 보장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 중 하나였다.

우선 일본이 패전한 직후부터 살펴보자면, 당시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당시 전쟁의 최고 책임자 였던 쇼와 덴노를 재판에 세우려고 했는데, 당시 덴노였던 쇼와 덴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쇼와 덴노는 미국이 자신을 재판에 세우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데 필요한 전진기지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덴노는 당시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와 협상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천황은 면책받고 전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같은 A급 전범들만 재판 받고 끝나게 되었는데, 그 대가로 미국에 넘어간게 오키나와였다.

50년대 이후

그리고 1950년대~1960년대의 경우 당시 일본에선 일본국민들의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평화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해 미국정부와 협상을 벌여 본토 내의 미군기지를 1/4까지 줄이는 데 합의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본토에서 줄어든 기지 만큼 오키나와로 옮겨져 갔다는 거다. 이래저래 오키나와만 제대로 피해를 본 셈.

그리고 1972년에 이곳을 류큐라는 나라로 독립시키느냐, 아니면 오키나와 현으로 존치하냐라는 의제가 일본 국회에 넘어가는데, 이 논의에서 오키나와 현을 독립시키지 않고 그대로 일본령으로 존치한다는 안이 가결되었고, 이 지역은 독립하지 못한 채 지금도 일본령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다만 1950년대에는, 일본으로 귀속하면 미군 기지를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따라 일본 복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만 1972년 당시의 '복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데, 지역 내에서 독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많고, 오키나와 현에서도 독립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설도 있지만, 독립하고자 하는 류큐인들의 입장을 묵살해 버리고 날치기로 오키나와 현 유지안을 통과시켰다는 설도 있어 두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실정이다. 24.9%가 오키나와인들의 류큐 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 심지어 1970년대, 일본 좌파운동이 강했던 시절에는 오키나와에 방문한 일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실제로 오키나와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오키나와 권익 옹호 단체들은 이런저런 이유에서 일본의 좌파계열 단체와 자주 연합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영유권 주장은 실제로 관철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게, 오키나와 주민들의 가장 큰 원성의 대상이기도 한 주류(駐琉)미군이 중국의 요구에 따라 얌전히 물러난다는 건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 국적임이 분명한 주민이 1, 2만도 아니고 140만 명이나 거주하기 때문에 과거에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현재의 영유권을 인정받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2012년 다시 불붙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분쟁에 따라 일본이 애초에 센카쿠 주변지대인 류큐 제도에 대한 주권도 없었다는 점을 거론해 일본의 주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파악되고 있다.

2011년판 일본 방위성의 방위백서에 따르면,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은 전체 주일미군 약 33,000명 가운데 23,000명(!)이며, 그들의 가족과 군속까지 합치면 총 43,550명에 달한다. 또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 현 전체에 대략 37곳이 분포하며, 기지면적은 현 전체 면적의 18.7%에 달한다. 대충 평택시 면적과 거의 맞먹는 지역이 미군기지로 되어 있는 상황이다.

오키나와의 주요 미군기지는 코트니 캠프 등에 해병대 시설 및 해병대 관리구역이 있으며, 해병대 제3기동전개부대사령부가 위치한다. 토리이에는 미 육군 제1특수부대군 제1대대 및 제10지원군이 주둔하고, 유명한 후텐마 기지에는 해병대 제36해병항공군 산하에 다수의 CH-46, CH-53, AH-1, UH-1 등의 헬리콥터 부대와 KC-130 공중급유기 등이 배치되어 있고, 이 기지에서 발진한 헬리콥터가 2004년 오키나와국제대학 교정에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극동 최대의 공군기지라 일컬어지는 가데나 기지에는 미 공군 제18항공단 산하에 F-15전투기, KC-135 공중급유기, HH-60 헬리콥터, E3 공중조기경보통제기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같은 기지 내에 해군 P3C 대잠초계기, 육군 1-1방공포병대대의 패트리어트 PAC-3가 배치되어 있다. 그 외에도 나하에 위치한 군항과 나하 국제공항, 캠프 화이트비치의 해군 저유시설, 구니가미의 해병대 훈련캠프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일부 시설은 자위대도 공유한다. 주) 이상의 자료는 2011년판 일본 방위백서를 참조한 책『오키나와와 평화』(2007)에서 참조했다.]]

그리고 2012년 9월 중순, 센카쿠 문제로 불거진 중-일 관계를 기화로 미 국방부는 오키나와 주민의 거센 반대를 묵살하고 M-22A 오스프리 수직이착륙기의 배치를 확정하고 일본 정부 역시 이에 동의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처사에 반발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10월 16일, 미군 병사 두 명이 귀가 중이던 여성을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하려고 기도한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한 번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일본 정부는 총리가 직접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불쾌함을 표시했고, 주일 미국 대사도 "미국 정부가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오키나와 현민의 분노를 이해한다. 일본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주민들은 "하늘에는 신형수송기 오스프리가 날고, 땅에는 걸어 다니는 흉기(미군 병사)가 있다"면서 "현민은 어디로 걸어 다녀야 하느냐"며 분노를 드러냈다.

2013년 5월 15일,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한 지 41년이 되는 날에 마침내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일종의 독립(문제를 논의하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목표로 '류큐자치연방공화국'의 건설을 내걸었다. '복귀' 이래 4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오키나와 차별, 미군기지 강요라는 구도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의 절정인 셈이다.~~ 물론 오키나와가 실제로 독립을 이룰 가능성은 낮다. 2007년만 해도 20%는 되던 독립지지 여론이 2012년에는 고작 1% 정도로 격감했기 때문도 있고, 일본 정부가 순순히 놓아줄 가능성도 제로에 가깝기 때문. 미군 기지 문제가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미국 역시 찬성할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실제로 오키나와의 독립을 추진하기 보다는, 오키나와의 분리-독립 가능성을 공론화시킴으로써 오키나와에 강요되고 있는 무수한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와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해) 오키나와만 분발해 봤자 (일본 정부와 미국의 전향적 자세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확산되고 있는 패배주의 풍조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오키나와 주민의 여론이 분리독립 찬성으로 기울게 되면, 일본 정부든 미국 정부든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제3자가 또 있으니…

바로 중국이다. 5월 15일 상기한 단체가 결성되자마자 다음 날인 1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환추시보가 중국이 민간 차원에서 일본의 영토로 돼 있는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센카쿠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가운데 센카쿠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커다란 틀을 손에 쥐기 위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 다만 오키나와 독립운동 지지세력도 중국의 영향력 강화는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이 정말로 지원해 준다고 해도 이를 받아들일 지는 미지수이다.

주민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았는데, 국토가 좁고 물을 잡아두기 힘든 지형 문제로 벼농사보다는 사탕수수 농사 위주로 농업 체계가 맞추어져 있다. 다만 90년대 이후 요즘은 오랫동안 일본의 영향을 받아 농업 기반이 많이 무너져 있는 게 문제.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기지 주변에서 깽판을 치는 GI들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특히 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한 이후 더 심해지면서 주민들은 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95년까지 약 사반세기 동안 미군 및 미군 군속이 저지른 범죄는 약 4716건에 달하며, 민간인이 살해된 것도 12건이나 된다. 특히 1995년 미군 병사 세 명이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쌓이고 쌓인 불만과 울분을 일거에 폭발시켜 일본 중앙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2004년에는 후텐마 기지에 인접한 오키나와국제대학 교정에 해병대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 주민들의 불안감을 키웠고, 2012년에 들어서는 미군이 오스프리 수직이착륙기의 후텐마 및 가네다 기지 배치를 강행하려다가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보류한 일도 일어났다.

하지만 미군기지의 전면 철수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요구이기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렇다면 미군기지를 본토로 이전해라'라고 하여 현외이설론(縣外移設論)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평등하지 않느냐는 얘기인데, 이에 대한 본토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다. 본토의 일본인들은 미군기지로 인한 평화와 안전보장이라는 수혜는 누릴 수 있어도, 미군기지로 인한 현실적인 피해와 불이익은 거부한다는 태도를 암암리에 고수하고, 미군기지의 존재로 인한 피해와 불편은 오키나와에 떠넘기고 있는 것. 이런 불평등과 차별 때문에 오키나와인 사이에서는 일본 본토(인)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현재 류큐에 사는 주민들은 거의 전적으로 관광업과 예능 산업, 공예 산업(이곳에서는 유리 공예와 나전칠기 공예를 쳐 준다)에 종사하고 있고, 소득 수준이나 학력도 가장 낮아 일본 내에서도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 실정. 이런 문제들 때문에 독립하자는 설이 심심찮게 대두되고 있고, 오키나와 지역 내부적으로도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모양.

동남아 계열의 문화가 섞이다 보니, 민족성도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는게 본토사람들이 갖고있는 이미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묘사된 오키나와인들의 모습을 종합해 보면 이국적이고 밝고 활기차고 생활력이 강해보인다라는 모습으로 종합할 수 있다. 현실의 오키나와 토인들이 다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 또한 창작물에서 한가지 특징은 피부가 까무잡잡하다는 거. 물론 다 그런건 아니다.

오키나와 방언

오키나와 지역에 존재하는 방언으로는 과거부터 쓰여 오던 여러 류큐어의 방언 중 하나인 오키나와어와 현대에 성립한 새로운 오키나와 지역의 언어인 오키나와벤이 있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독립 문제

현재까지도 종종 류큐국으로의 재독립을 운운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 출처: 엔하위키-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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