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꾼(萬石君)

萬:일만 만. 石:돌 석. 군:임금 군

벼 만 섬을 거두어 들일 만한 논밭을 가진 부자

만석꾼(萬石君)의 이름은 석분(石奮)이며 그의 부친은 조나라에 살다가 진(秦)나라가 천하 통일을 했을 때 하내(河內) 땅의 온(溫) 지방으로 이사하였었다. 부친을 따라 하내 땅에 살고 있던 석분은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공격하기 위해 하내 땅을 지나게 되었을 때 당시 15세로 우연한 기회에 유방의 밑에 들어가 시중을 들게 되었다. 유방(高祖)은 석분의 공경심과 신중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고조는 그 누이를 미인(첩의 한 계급)으로서 후궁에 데려왔고 석분을 시종(侍從)의 직에 앉혔다. 문제(文帝) 때에는 대중대부(大中大夫)에까지 승진했다. 학문은 없었지만 공경심과 신중한 태도는 비할 데가 없었다. 태자의 양육 담당이었던 장상여(張相如)가 면직되자 그 후임으로 다들 석분을 추천했다.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석분을 구경(九卿)에 들게 했는데 지나치게 예의가 바른 바람에 답답해진 나머지 제후인 승상의 자리로 옮기게 했다.

석분의 장남인 건(建), 차남, 3남, 막내인 경(慶)까지도 모두 착실한 선비로 효행이 깊고 행실이 단정했으며 벼슬도 각각의 아들들이 모두 2천 석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경제는,

"석분과 그의 네 아들은 모두 2천 석으로 합치면 1만석이군. 부귀와 은총이 한 집안에 다 모여있소." 라고 말하고는 이후부터 석분을 만석꾼(萬石君)이라 불렀다.

효경제 말년에 만석꾼은 은퇴하여 고향에 내려가 있었으나 상대부(上大夫)의 신분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궁중행사에 초대되어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에도 그는 정성스레 예의를 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손들 가운데 벼슬을 한 사람이 인사라도 오게 되면 상대가 아무리 지위가 낮더라도 반드시 예의를 갖춰 맞았으며 그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자손들 중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꾸짖지 않고 먼저 스스로 꾸짖고 자기 방에 들어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자손들은 서로 잘못을 밝혀 연장자를 통해 매를 맞을 각오로 웃옷을 벗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용서해 주었다.

그의 자손들도 만석꾼의 가르침에 따라 효행과 성실함에 힘썼으므로 그 가족의 명성은 천하에 드높아졌으며 심지어 제나라와 노나라의 이름있는 유학자들까지도 스스로 만석꾼 집안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석경이 승상으로 있을 때, 만석꾼의 자손들 중 관리가 되어 2천석의 직책에 이른 사람은 무려 13명이나 되었다.

[출전]《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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