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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이란?
이미 최면은 과학적인 학문 체계를 가진 의학의 한 분야로 성장해 있다.하버드 의과대학을 비롯한 많은 병원에서 최면치료를 하고 있으며, 최면 의학 전문의 자격 제도가생긴지도 이미 30년이 넘었다.
최면은 과학적이지만 그와 함께 신비한 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매우 독특한 분야다.최면은 병의 근원이 몸과 마음의 경계선상에 있다고 보고, 그몸과 마음의 경계선을 타고깊숙하고 고요한 정신 세계의 내부로 들어가는 치료법이다.
최면이라는 말을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 다양하다. 이는 우리가 정신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것을 정의하라고 했을 때에는 아무도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최면이라 함은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동작 등의 신호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반응을 유발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면은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 집단 대 집단 혹은 집단 대 개인으로 할 수 있다. 최면은 반응을 일으킬 때 최면 상태라고 명명되어지는 어떠한 생리적인 변화를 매개로 하는 수가 많은데 이 특정한 생리적 변화된 상태를 최면 상태라고 한다. 또한 타인간의 최면에 있어서는 유도자와 피유도자 간의 관계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를 최면 관계라고 명명한다.
한편 타인최면에서 유도되는 것과 같은 상태는 반드시 타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개인 스스로도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경험 될 수 있어 이러한 모든 것들을 최면이라고 광범위하게 정의하기도 한다.
최면을 유도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의사들은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 유도함이 그 일차적 목적이라 하겠다. 즉 최면을 이용하여 치료를 하는 것을 최면치료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최면 혹은 좁은 의미로서 최면치료를 최면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의사-환자 관계의 맥락에서 의사가 말과 행위를 이용하여 환자의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정의 해본다.
현재 최면은 정신집중, 소통, 변화된 의식의 상태, 암시 등등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개념으로 정의되어지고 있다. 그 개념들 및 최면에서의 생리적 변화에 관한 내용들을 알아본다.
"편안한 자세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숨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최면을 유도할 때 처음 시작하는 말 중의 하나인데 최면은 서서히 자신의 몸과 마음 안으로 주의를 기울여 가는 것, 즉 마음의 문을 열고 보다 깊은 자신의 정신 세계로 향해 가는 것이다.
최면이란 말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최면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 그저 막연히 최면이란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느낌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최면을 편안하고 안락하며 고요한 세계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 어떤 사람은 왠지 두렵기도 하고 무서우며 복잡한 세계라는 느낌 을 가지기도 한다. 최면은 일종의 무의식의 탐구이다. 그곳은, 바다 속과 같이,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우리의 마음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갈등 혹은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근원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불안에 대한 자연적인 방어로서의 최면 상태 및 최면치료.
인간은 참을 수 없이 불안하면 스스로 몰입경 혹은 최면상태를 찾으려 하는 특성이 있다(Frankel, 1990)고 하였듯이 불안할 때 인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도 모르게 하느님, 부처, 신등에게 기도를 하는 수가 많다. 우선 자세를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 한 후에 즉 몰입경을 유도 한 후에 기도문 혹은 주문을 외우는데 그 내용은 대개 편안함을 구하는 내용이다. 즉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치료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특성은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교회와 절에는 종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모을 때 종을 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모을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종을 사용해왔을까? 종은 그 소리의 파장이 특이하며 공명 현상이 소리를 내는 다른 도구들에 비하여 강하다. 즉 반복되는 컸다 작았다하는 독특한 소리는 자연스럽게 듣는 사람의 정신을 집중시키게되고 그 정신 집중은 또 자연히 몰입경 즉 최면 상태를 유도하게된다. 종을 반복해서 치는 그 자체가 소리를 이용한 최면유도법 인 것이다. 신도들만이 안정을 위해 스스로 자가최면치료의 일종을 행 한 것만이 아니라 사원에서도 신도들을 위해 최면 상태를 유도해 주었던 것이다.
불안하거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하느님, 부처 혹은 신등을 찾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치유 해 줄 능력이 있다고 믿거나 혹은 들었기 때문이다. 의학의 발달로 이제 그 치유력은 의사가 가지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환자들이 믿게 되었음으로 환자가 자신의 증세를 치유할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질병 행동양상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아직도 의학보다는 신 혹은 종교가 치유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목회자, 스님, 무당등을 찾아 치유 해 주기를 소망 할 것이다.
변화된 의식상태로서의 최면 상태
의식의 상태가 변한다.
20세기 중반이후 서구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동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천년 전 즉 서기 천년경의 세계에는 중국, 인도 그리고 서양으로 분류 될 수 있는 3가지의 큰 의료 체계가 있었다. 세 체계는 서로간의 교류는 있었지만 각각 그 사회의 종교, 문화, 정치적 체계에 따라 서로간에 분명히 다른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 서양의학은 당시까지의 '체액 개념'(humoral ideas)을 버리고 인체를 각 부분으로 즉 장기, 조직, 세포 등으로 세분하고 병을 구조적 이상 혹은 생리적 기능의 장애라는 개념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의 병은 이제 고장난 인체의 부분을 수리하고, 교정하거나 병의 원인이 되는 외부적 요인 즉 세균 등 을 제거해야 치료되는 것으로 파악되게 되었다. 이러한 분석적이고 물질적인 접근은 그 치료 성과에 있어서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근본적으로 의료체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제 서양의학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단순히 의학 혹은 현대 의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Worboys, 1997).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필연적으로 공격적인 치료법을 발전 시켰으며 인간을 전체로서 이해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류에 반발하는 일부 서양 사람들은 이제는 잊혀진 과거의 유산을 찾거나 아직도 변하지 않고 예전처럼 남아있는 인도와 중국의 의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타고 20세기 후반 들어 인도의 명상이 서양 의학에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또한 의학적 치료 효과를 일부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당시 미국에는 히피와 반전 및 반사회적인 운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종종 이러한 사람들이 마약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약물 중독을 끊지 못하는 이유 즉 '왜 그 사람들이 잡혀갈 줄을 알면서도 마약을 하는가?'에 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특히 약물이 중독 되어있는 상태 즉 '도대체 어떤 상태이기에?' 라는 것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 중에 명상으로 도달하는 상태와 마약으로 도달하는 상태에 비슷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변화된 의식 상태(ASC; 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라고 하게 되었다(Ludwig, 1966).
그런데 히피들이 변화된 의식 상태를 추구한다하여 변화된 의식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일부 반사회적, 퇴폐적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또한 명상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자연히 그 종교적 배경이 되는 힌두교와 불교의 사상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의 일부는 원래가 기독교인 자신들의 종교를 불교나 힌두교로 개종하기보다는 기독교에 힌두교 혹은 불교의 교리를 혼합시킨 뉴에이지(New Age)라는 힌두교와 불교와는 상관이 없는 기독교의 사이비 종파적 운동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미국의 일반 기독교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변화된 의식 상태라는 단어에는 한 가지 더 바람직하지 못 한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들로부터 최면이 반대되어지는 개념적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근본주의자들이나 사이비 종파이던 간에 주로 환각을 통하여 신비한 현상을 경험함으로서 그들의 믿음을 확고히 해 간다는 점에서는 같다. 성경에는 현재에 최면 상태와 동일한 단어로 쓰이는 몰입경(trance)을 통하여 신과 사제들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에도 모든 것을 성경 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환각과 힘의 전달 등이 주 요소이다. 물론 이들은 이 것들을 환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세계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다.)의 주류는 유도되거나 암시 받은 환각을 통하여 신을 믿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교회 특히 개신교는 전반적으로는 초기 열성적 발달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개신교회의 많은 곳이 이러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도들 특히 환각이나 신비한 경험을 유도함으로서 믿음을 전파하고 유지하고자하는 목회자들로부터는 최면이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는 나중에 전생의 기억과 연관된 장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또한 변화된 의식 상태라는 것은 자기제어가 되는 일반적 의식 상태에서 자기제어가 풀어진, 속어적 표현으로 '뿅갔다'라는 상태의 의미를 함축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속을 받지 말아야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자신을 보호 혹은 방어해야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자기제어가 풀어진 뿅 간 즉 의식이 없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태가 일종의 두려운 상태로 인식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으로 파악되는 최면은 일반인들에게 두려움을 유발하게된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이 최면을 두려운 것으로 파악하는 배경에는 '뿅간' 상태 즉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탄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직도 한국의 개신교회의 많은 곳에서는 정신질환을 마귀들림으로 신도들에게 가르치면서 퇴마를 행하고 있는데 이는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다.
따라서 변회된 의식 상태라는 말의 정의는 과학적으로는 올바른 것이나 종교적, 개인적, 사회적 인식 여부에 따라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용어이기도하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개념은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서 그 종교가 무엇이던 간에 종교적 행위 그 자체는 과학적으로는 변화된 의식 상태를 동반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정통 종교이던 사이비 종교이던 그 내용이 다른 것이지 그 형태는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란 과학적으로는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믿는 것으로서 그 어느 종교도 과학적으로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흔히 동양 특히 한국인은 종교와 과학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무지와 잘못된 믿음의 소치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타인에게 통제 받지 않으려는 자기보호 본능의 유발은 타인이 최면에 걸리는 상황을 관찰할 때 유도자에 의해 강제로 조종을 받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인데 이는 오해로서 최면은 의식을 잃고 통제력을 잃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단순히 약간의 변화된 정도이기 때문에 최면에 걸린 사람은 자기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최면상태는 피유도자의 자발적 협조 없이는 유도되지 않기 때문에 피유도자의 일견 통제력을 잃은 듯한 행동은 사실은 최면이라는 맥락을 통하여 통제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의 표출 인 것이며 실제로 완전히 통제력을 잃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최면은 종종 독재자에 의해서거나 어떠한 사회적 상황하에서 일시적으로 자제력을 잃은 대중의 광란적 행위를 지칭 할 때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들과 같은 편에게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반대편들에게만 이 말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추정컨대 다른 편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즉 속 된 의미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으로 쓰고있는 듯하다. 그럼으로 온전한 정신인 우리는 저러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사실은 그 독재자에게 몰입해있는 대중은 객관적으로는 가수의 콘서트에서 열광하는 관중과 같은 상태인 것으로서 이들은 모두 그들 스스로 원해서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지 강요로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가수의 콘서트의 관중과 독재자의 관중과는 그 내용상 독재자의 관중의 경우 사회적 압력에 따른 개인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광란적이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어 그 내용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겠다.
그럼으로 통상 변화된 의식 상태를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개념적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그 내용상의 차이 일뿐 그 형태는 모두 같은 것 인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이 집중된다.
최면 유도는 정신 집중으로 시작된다. 추를 보게 한다든지, 번쩍거리는 불빛을 보게 한다든지, 아물아물한 그림을 보게 한다든지 하는 행위들은 모두 피술자의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정신 집중이 최면 유도의 첫 단계이며 이를 시작으로 원하는 내용을 삽입하게된다. 이렇게 하여 도달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일반적인 각성 상태와 달리 변화되어있는 상태를 최면 상태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으로 보면 정신집중은 반드시 최면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상황하에서 다른 사람의 유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젊은 시절에 영화에 몰두하여 재미있게 보고 나서 영화관에서 나올 때, 특히 그 때가 한 낮이라면, 순간적으로 기분이 약간 이상해지는 즉 상태가 변하는 순간의 경험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 역으로 추론하면 영화를 보고 있었을 당시는 영화를 보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거쳐 완전히 영화관에서 나온 즉 일상적인 심신의 상태와는 달랐던 심신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영화에 몰두해 있는 당시에는 주변의 모든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일시 중지되고 영화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즉 주변 인식은 감소되었고 및 초점 인식은 증가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몰입경은 최면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유도자가 없었지만 최면 유도와 같은 맥락이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비교해보자. 최면에서는 환자는 최면을 가 끝나게되면 상태의 변화를 느끼면서 각성하여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이 두 가지 상황은 그 이름만 다르게 붙여졌을 뿐 그 맥락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으로 보면 최면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그렇게 붙여놓아서 특별하게 느낄 뿐 사실은 우리의 일상에 흔하게 있는 현상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두 가지 상황에서 크게 다른 점은 최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느냐 아니냐 하는 것 뿐 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또 다른 몰입해 있는 상태들의 예는 우리의 일상 어디에든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모든 정신이 공부에 집중되어 누가 옆에서 부르는 것도 모르게 된다던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온 정신이 사랑의 대상에 집중된 나머지 매우 추운 날에도 주변의 추위를 모르는 수가 있다던가 하는 경우들이다.
최면을 정신집중으로 보는 개념은 Spiegel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그는 최면이란 "A state of attentive, intense focal concentration with diminished peripheral awareness(Spiegel, 1978)."라고 하였다. 한곳에 강하게 정신이 집중된 상태라는 것이다. 사람은 주변 인식과 초점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가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항상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다가 일시적으로 주의가 한 곳에 집중되면 즉 초점 인식이 증가하면 상대적으로 자연히 주변의 일들은 잊혀진다. 즉 주변 인식은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최면 혹은 최면 상태라는 것은 이상하거나 병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어디에나 있는, 또한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매우 정상적인, 생리적인 것이다. 때문이다.
주의를 기울이거나 정신을 집중하게되면 자연스럽게 최면 상태 혹은 몰입경에 이르게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러한 상태는 반드시 최면치료가 아니더라도 명상, 기도, 참선 등에 의한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완 된다.
이완이란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 Relaxation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통상 의학적인 의미의 이완은 자율신경의 활동이 감소한 상태, 그 중에서도 교감신경의 활동이 감소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최면을 유도할 때에는 보통 편안한 상태가 되도록 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완이 되기도 하지만, 특별히 이완을 하도록 암시를 주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이완이 되기도 한다.
최면 이외에 이완을 일으키는 방법에는 명상, 선 그리고 기도 등이 있다. 최면을 변형시켜서 이완을 유도하는 방법들도 있는데, 오토제닉 트레이닝과 점진적 이완이 여기에 속한다. 최면은 유도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을 풀어 주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모든 경우에 가장 빠른 치료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감각이 변한다.
최면 상태에서는 의식의 상태가 변화되어 느껴지는 이외에 생리적인 감각들에도 변화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저린 감각, 분리 감각, 부유 감각, 진통 등이 자연적으로 즉 이러한 감각들이 생기도록 유도하지 않더라도, 생길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감각들은 의도적으로 유도하여 경험하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최면에서는 환각이 자연적으로 혹은 유도되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그 행위에 최면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안 붙이거나 상관없이 비슷하게 일어난다.
다음은 내가 정신과 전공의 2년차 시절인 1985년에 경험한 환자의 사례이다. 그는 교수로부터 우울증이라는 진단으로 정신치료를 하도록 지시 받은 28세의 기혼 남자였다. 나는 우울과 불안을 동반한 자기애적 인격 장애 환자로 파악하고 통원 정신치료를 주 1회로하고 있었다. 수개월의 치료에도 그다지 성과가 없어 나는 당시 불안의 해소법으로 전공의 강의에서 이호영 교수로부터 배운 이완법을 적용해 보았다. 그러던 중 눈을 감기고 이완법의 유도문이 중간정도 지났을 때 그는 눈앞에 호수에서 용이 비린내를 풍기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 반응이 상당히 격렬하여 나는 놀라움에 그 자리에서 환자를 흔들어서 눈을 뜨게 하고 이완법을 중단하였다. 당시 미숙한 의사였던 나는 그 반응에 두려움과 염려를 느꼈다. 그 환자가 그 순간에 경험 한 것은 분명히 환시, 환취 등의 환각이었고 일반적으로 환각이 있으면 일단 정신증을 의심해 보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그 환자가 정신증이 된 것인지 근심이 되었다. 나의 이완법 시술에 의해 정신증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니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최면에 의해 잠재성 정신증이 발생 할 수 있다는 당시 정신의학 교과서의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당시 나를 지도하던 외래 교수에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는 그 환자의 잠재적인 정신증이 발현이 되었다며 내가 큰 일을 저질렀다며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했냐고 나무랐다. 마음을 졸이며 다음 치료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행히 그 환자에게는 정신증적인 양상이 없었으며 이완법 시술 이전과 다른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일단 안심은 되었으나 혹시 늦게 발현 될 수도 있을지 몰라 한달 동안을 관찰하였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는 잊고 지냈는데 나는 이 현상의 의미를 나중에 최면 공부를 하면서 알게되었다.
이완법은 일종의 최면 유도법이며 따라서 내가 그 환자에게 최면을 하자고 하지 않았고 그 환자 또한 최면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환자는 최면감수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간단한 유도문 만으로도 매우 깊은 최면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며 그 상태에서 그의 무의식적인 내용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환각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는 병적인 현상이 아니며 생리적인 즉 정상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환상의 내용은 용이 승천하는 것으로서 그의 무의식적 과대망상적 욕구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환자는 이후 내가 최면전문의가 된 후 다시 나에게 찾아와 최면치료를 받아 매우 호전된 상태로 상호 합의하에 치료를 종결하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환각을 호소하면 정신증으로 일단 받아들이는 의사들이 많다. 그러나 이중 많은 부분이 생리적 현상일 수 있으니 최면에 대한 지식은 의사로서 필수적으로 알고있어야 할 지식이다. 최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의사들이 환자가 환각을 호소하면 일단 정신증을 의심하고 항정신병약을 투약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리적인 현상을 병리적인 현상으로 진단하게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즉 정상인을 인위적으로 정신질환자로, 그 것도 정신증으로 만들게되는 것이다. 또한 한 정신질환을 가지고있는 환자에게 이러한 현상이 자연발생적으로 어떠한 상황하에서 발생했을 경우에 그 진단 및 치료에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만약 그 환자에게 정신증이라고 의심하여 항정신병약을 투약하였다면 어찌되었을까?
최면에서는 모든 종류의 환각이 가능하다. 즉 환청, 환시, 환취, 환촉이 모두 가능하다. 또한 최면의 환각에는 양성 환각과 음성 환각이 있다. 양성 환각이란 지각이 생기는 양상을 띄는 것을 말하며 음성 환각이란 지각이 없어지는 형태의 것을 의미한다. 양성 환청은 없는 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생기는 것이고 음성 환청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것 즉 일시적 귀먹음 상태이다. 양성 환시는 없는 물체가 보이는 것 음성 환시는 일시적 장님 상태이다. 양성 환취는 없는 냄새를 맡게되는 것 음성 환취는 일시적으로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양성 환촉은 피부에 없던 감각이 생기는 것 음성 환촉은 피부의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환각은 최면감수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잘 나타나고 또한 사람에 따라서 그 나타나는 양상이 다르다.
이러한 상태는 정신증 상태와 비슷한 양상이다. 전반적으로 현실 감각이 일시적으로 줄어든 상태 인 것이다.
최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진통 효과이다. 최면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Braid는 스스로 자신의 관절염에의한 동통 조절에 자기 최면을 사용했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최면의 진통효과는 예전이나 현재나 최면의 가장 큰 효용가치중의 하나이다. 두통, 요통 등의 동통진정효과 만이 아니라 최면은 마취의 효과까지 나타낼 수 있다. 마취약이 발명되기 전까지 수술은 강제로 환자를 결박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최면마취는 그 당시에도 여러 분야의 수술에서 이루어졌다. 간단히 장갑마취법을 사용하면 최면의 진통효과 혹은 마취효과를 실험해 볼 수 있다. 그 방법은 최면 유도 후에 손에 마취제가 투여된다 혹은 그저 단순히 손이 통증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라는 암시를 주고 나서 주사바늘을 찔러보면 된다. 피술자는 최면 전에는 매우 강한 통증을 느끼지만 최면 중에는 바늘이 들어오는 것은 알지만 통증은 없는 현상을 경험하게된다. 최면의 마취, 진통 효과는 게이트 설(Gate Theory)로 설명되어지기도 한다.
시간경험이 달라진다.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이 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에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던 여행의 경험도 있을 것이다.
한 시간의 최면치료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시계를 본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 생각에는 한 30분 정도 지났다고 생각되어서 오늘은 벌써 끝나나 하고 시계를 보니 이미 45분이나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최면 상태에서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실험 결과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최면 상태에 있었던 시간을 실제의 시간보다 약 40% 정도 짧게 느낀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최면상태에서는 단위 시간에 들어오는 정보의 수가 적기 때문에 그만큼 뇌에서는 처리해야 할 정보의 수가 적어서 시간을 짧게 측정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뇌에서 측정하는 시간의 길이는 처리해야 할 정보의 수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자아상태가 분리된다 - 해리.
최면 중에는 유도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자신의 분리된 모습을 보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상상하라고 지시했을 때 환자 스스로, 특별히 유도자가 암시하지 않았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자기의 모습을 또 다른 자기가 위에서 내려가지 않고 있으면서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최면치료를 받고있는 자기의 모습을 자기가 위에서 내려보고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해리를 처음으로 자세히 연구한 Janet는 해리 현상 그 자체를 병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해리는 의식의 병리적인 내용들이 의식되는 인격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움직일 때 생긴다면서 해리 된 내용들은 몰입경에서만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Dissociation occurs when certain pathological contents of consciousness are completely split off from the conscious personality and operate independently. They become available only in trance.(Janet, 1925; Brown & Fromm, 1986에서 재인용)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해리를 정상적인 정신 현상의 하나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Hilgard는 실험에서 대상자가 각성 시에 얼음물에 손을 담그면서 그 동통의 정도를 숫자로 기록하게 한 후에 그 대상자에게 최면을 유도하였다. 최면에 유도된 그에게 다시 얼음물에 손을 담그게 하니 그는 말로는 동통을 느끼지 못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손이 동통을 표현한다는 말과 함께 자동필기(automatic writing)를 시행하니 그의 손은 동통의 정도를 숫자로 기록하였다. 그는 이 실험의 결과로 최면 중에 동통이 의식에는 전달되지 못하지만 정신의 일부가 동통의 정도를 입력 받고있다고 추론하였다. 그는 최면 중에 의식에서는 숨겨져 있으나 동통을 입력받고있는 부분을 숨은 관찰자(hidden observer)라고 하였다. 신해리설(Neodissociation Theory; Hilgard, 1977)은 해리의 기전을 통상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통합되어있는 인지과정들이 최면 중에 일시적으로 통합력과 조종력이 감소함으로서 경험의 일부가 의식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리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정신적 충격에 의한 외상후성스트레스장애와 다중인격장애(DSM-IV에서 해리성정체성장애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의 기전을 설명함에 있어서 Spiegel(1986)은 해리를 정상적인 방어기전의 하나로 이해한다. 즉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때 몰입경 용량(trance ccapacity)이 큰 사람들은 자연발생적 몰입경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이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해리를 주 방어 기전으로 사용한다는 것인데 그 결과로 충격의 기억은 의식에서 인식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격을 받을 당시에는 해리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다시 그 사람이 몰입경 상태에 유도되면 해리 되어있던 기억들이 표출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후에 외상후성스트레스장애와 해리성정체성장애를 다루는 부분에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정신을 완전한 하나로 보지 않고 부분들로 나누어 파악하는 것에 자아상태(ego state: Watkins, 1978)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면 숨은 관찰자 같은 것이 일종의 자아상태인데 정신은 정상적으로 여러 부분들로 나누어져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사람의 인격 안에는 의사로서의 부분, 아버지로서의 부분, 남편으로서의 부분, 아들로서의 부분 등이 동시에 형성되어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여러 개의 자아 상태들 간에는 그러나 항상 연결과 분리가 의지대로 될 수가 있어서 의사로서 행동하다가도 전화가 아내에게서 왔을 경우 그는 곧 남편으로서 행동하게되는데 이때 순간적으로 전체 정신을 주도하는 자아상태가 의사부분에서 남편부분으로 바뀐다. 한 사람 안에는 수많은 자아상태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간에는 언제나 연결과 분리가 자유롭다. 그럼으로 정상적 정신은 해리와 연결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자아상태 해리의 예로서 운전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운전자로서의 자아상태가 없었으나 운전을 배우면서 운전자로서의 자아상태가 발달되게된다. 이 운전자로서의 자아상태는 처음에는 운전 중에 그 사람의 정신의 주도권을 잡고 그 사람의 정신을 통제하지만 발달이 진행되게되면 완전한 해리 상태에서도 자동적으로 활동 할 수 있게된다. 현상학적으로는 표현하면 운전자는 운전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운전을 할 수 있다.
해리는 정상적, 병적인 현상일 수 있으며 몰입경에서는 자연스럽게 해리가 일어 날 수 있다. 최면유도는 몰입경을 유도하는 것이니 최면 중에는 해리가 일어 날 수 있다.
저절로 움직인다. -무의식성(Involuntarism)
스스로의 생각 혹은 다른 사람의 말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육체의 감각 변화와 운동이 생기는 현상은 반드시 최면이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 중에도 일어날 수 있다. 다만 최면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극대화된다.
예를 들면 양손을 앞으로 나란히 한 상태에서 양 손바닥의 간격이 줄어든다 즉 가까워진다는 말을 듣고 대상자는 의지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즉 무의식적으로 의지와는 상관없이 양손이 가까워 질 수 있고, 양손바닥에 서로 다른 극의 자석이 붙어있다고 말을 들은 대상자는 양 손바닥간에 자력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면서 양 손바닥이 서로 다른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때 양손은 저절로 움직이면서 서로 자석처럼 붙게된다.
이처럼 최면유도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운동기능이 변화하게된다. 이러한 현상을 생각-운동 현상(ideomotor phenomenon)이라고 한다.
잊혀진 기억들을 되찾는다.
최면 상태에서는 기억이 잘 떠오르기도 한다. 따라서 최면을 통해 까맣게 잊었던 기억을 찾아낼 수도 있다. 한번은 20대 중반의 회사원이 나를 찾아왔다. 액수가 씌어 있지 않은 수표를 잃어버렸는데 그 수표를 주운 사람이 그것을 주어서 액수를 써넣을까 봐 걱정스럽다는 것이었다. 6개월 후에 재판을 하면 그 돈을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일단 돈은 내주어야 하기 때문에 큰일이라고 했다. 보름 동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잃어버린 날은 기억나지만,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최면을 걸고 그날의 일들을 마치 비디오를 보듯이 천천히 눈앞에 떠올려 보라고 했다. 그날의 모든 일들은 뇌 안의 어딘가에 반드시 녹화되어 있을 것이므로 녹화된 부분을 찾아서 VTR에 넣고 슬로 비디오를 보듯이 천천히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날의 기억들이 화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날 다닌 여러 은행들 중의 한 은행의 차장 책상 위에 그 수표가 있는 것이 보였다. 또한 그 은행을 떠날 때 탔던 택시 안에는 그 수표가 없는 것이 보였다. 이것으로써 그 수표는 그 차장 책상과 출입문 사이에서 없어진 것이 분명해졌다. 다음날 그가 그 은행의 차장 책상에 가보았을 때 그 수표는 책상과 책상 사이의 틈에 깊숙이 끼워져 있었다.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수용성
변화는 말의 피수용자가 수용적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나기 쉽다. 이러한 수용적 상태는 최면에 의해 가장 빠르고 쉽게 달성된다. 최면상태는 깨달음의 유발을 촉진시킬 수 있는 상태이다. 대상인이 최면유도를 받는 것 혹은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용성의 증가를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최면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나 경험 없이 그저 막연한 상태에서 최면유도를 받게되며 무슨 일이던지 간에 처음으로 하는 일은 미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게 마련인데 이러한 모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최면을 허용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최면 유도자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표현이기도하다.
최면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대상인의 무의식이 투사되는 특성이 있다. 막연한 최면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은 여기에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최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중에는 자기자신의 조종능력을 상실하고 최면유도자가 시키는 대로 하게되지 않을까 즉 유도자가 좋지 않은 것을 시키면 좋지 않게 될 수도 있겠다, 깨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즉 죽는 것은 아닐까, 나의 비밀이 나도 모르게 최면 중에 다 드러나서 유도자가 나의 이러한 비밀을 퍼트리거나 이용해먹지는 않을까 하는 것 등이 있다.
내가 말로 하는 정신치료를 하면서 가장 답답하게 느꼈던 것은 도대체 저 사람의 잘못된 생각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신과 초년생 의사로서 정신질환자들을 만났을 때 나는 처음에는 그들의 망상이나 신경증적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하였지만, 아울러 당시의 치료법인 약물치료와 정신분석적 치료법들에 대한 회의도 있었다. 약물치료에 대한 회의는 정신적인 이상을 어떻게 약으로 완전히 고칠 수 있겠나? 하는 것이었고 말로 하는 정신치료에 대한 것은 주 1회 혹은 주 5회의 면담으로 3년 내지 5년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래봐야 고칠 수 있다는 보장도 별로 없고 좋아지는 환자도 별로 많은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러한 치료법이 주는 장점들도 있는데 그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 일반외과 의사였었는데 전공의 1년차 때에 현실적 여건 때문에 정신과로 바꾸게 되었다. 일반외과를 지망했던 이유는 수술이 주는 속 시원함 때문이었다. 수술로서 병든 부분을 도려내고 환자는 치유되는 그 과정이 만족감을 주었다. 외과에도 그 분야가 많은데 특별히 일반외과를 선택했던 이유는 일반외과의 수술이 그 규모가 크고 많은 경우에 상대적으로 보다 더 극적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성격으로 인해서 정신과의사로서의 나의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즉 어느 세월에? 병을 고쳐주나 하는 것이 심한 무력감을 주었다. 그래서 최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생각에는 확 최면을 걸어서 뭐라고 해주면 병을 고치기가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신과 환자들은 저항이 심하기 때문에 말이 먹히지가 않는데 최면을 걸면 말을 잘 듣는 상태가 되어 말이 먹힐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최면 공부 초기의 일이다. 당시 재미 정신과의사이며 최면의학을 한국 정신과의사들에게 정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김병석선생께서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최면에 대한 특강을 하셨다. 강의 후에 말로 하는 즉 최면을 하지 않는 정신치료를 하는 사람이 도전적으로 물었다. 최면치료에서 환자에게 해주는 말들을 들어보니 별 특별한 말도 아니고 최면을 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말들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냐 왜 꼭 최면을 걸고 해야하는가? 하는 요지였다. 김선생께서 갑자기 나온 도전적 질문에 당혹하여 대답을 잘 하지 못하셨다. 나는 집에 돌아와 그에 대한 대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수용성에 대한 설명에서 답이 있으나 이렇게 비유적으로 생각해 본다. 약은 그 투여방법이 중요하다. 정맥주사로 투여했을 때 즉시 효과를 발휘하는 약(예를 들어 항생제)이 있다하자 이 약을 피부에 바르면 효과가 있겠는가? 아무리 열심히 정성스럽게 피부에 발라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이 약이 체내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정맥주사 경로를 만든 다음에 투여 해야한다. 최면을 유도하는 과정은 정맥주사 경로를 만들어 주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즉 치료적인 말이 환자에게서 받아들여 질 수 있도록 투여 경로를 확보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후에 치료적인 말을 환자에게 주어야 그 효과가 나올 것이다.
치료적인 말은 말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최대한으로 받아들여질 자세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대효과 - 기대가 있어야 효과도 크다.
모든 치료에는 기대 효과(expectation effect)라는 것이 있다. 어떤 의사가 용하다, 누가 무슨 병을 고쳤다더라 하는 등의 언질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환자들의 가련한 심정을 자극하여 마치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을 보듯이 기대에 부풀게 한다. 이러한 기대는 전지전능 전이를 발현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각을 그 의사에 집중시키게 한다. 즉 이 환자는 이제 그 의사를 만날 생각을 하면서 온통 자기의 정신을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히 약한 정도의 몰입경 상태를 유도하게된다. 즉 이 환자의 마음속에서는 기대와 함께 수용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 의사와의 상견이 이루어지고 또한 그 상황에서 그 의사가 자신의 아픈 곳을 정확하게 짚어준다면, 그 환자의 그 의사에 대한 신뢰는 더욱 증폭되어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 의사가 주는 약은 단순한 물질로서의 약 이상의 효과를 발휘 하게된다. 그 약은 이미 그 의사를 상징하는 물건이요, 그 환자는 그 의사의 상징을 즉 그 의사의 일부를 먹는 것이다. 기대효과는 최대한으로 증폭되게 되고 이 경우 최대한의 플라시보효과(placebo effect)가 있게 될 것이다.
강력한 긍정적 전이, 전지전능 전이의 예를 보겠다. 내가 본과 4학년 때의 이야기이다. 한 외과의사가 있었는데 그 의사의 소문이 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나 있었다고 들었다. 내용인즉 핏줄이 칼끝을 피해간다는 것이었다. 그 의사가 수술을 할 때는 환자의 핏줄이 그 의사의 칼끝을 알아서 피해줄 정도로 그 의사가 용하다는 것이다. 외과 전공의들은 여러 교수들의 수술에 보조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간의 수술 실력을 자연히 비교, 분석하게된다. 물론 그는 실력이 있는 의사였다. 그의 특징은 출혈을 약간 적게 보면서, 사실은 거의 출혈양은 비슷했다, 수술도 간결하게 빨리 잘 하는 편 인 듯 했다. 또한 같은 상태이면 비교적 온건한 수술법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환자의 핏줄이 의사의 칼끝을 피해 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일부 전공의들은 그의 수술이 오히려 너무 온건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많은 환자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것으 s사실이다. 환자가 가지고 있던 긍정적 전이들이 수술 결과 및 예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는 다시 소문의 형태로 긍정적 전이를 증폭시킨 결과로 여겨진다.
최면에서도 이러한 긍정적 전이의 효과는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에 대구의 지부학회 창립 자리에서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최면치료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에게 최면을 배운 정신과전공의에게 최면치료를 몇 차례 받던 환자였는데, 시범 치료 후 서울에 있는 나에게 최면유도시 전공의 선생님이 할 때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유도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1년 도를 닦은 것과 10년 도를 닦은 것이 차이가 나듯이 경력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물론 나의 유도 기술이 초보자의 그 것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으나 그 선생도 나에게 자세히 배웠으니 그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고 본다. 그 보다는 유명하다, 용하다, 실력있다더라 하는 생각들이 환자의 기대 효과를 증폭시켰고 이 것이 최면의 깊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최면에서의 기대를 오라(aura)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오라란 종교화에서 성인(聖人) 얼굴 뒤에 둥그런 원을 그려 놓은 것을 의미한다. 의사가 질병에 대한 치유력을 가졌다고 여겨지기 전 즉 과학적 의학이 시작되기 전 수 천년 동안 종교 지도자들이 치유력을 가졌다고 ale었던 시기가 있었다. 샤만, 승려 등이 치료를 담당했다. 기독교나, 불교에도 병을 고치는 역할은 예외가 아니다. 예수는 스스로 불치의 병을 치유함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석가모니가 그러한 일을 하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많은 신도들은 그러한 능력을 기대 했었을 것이고 현재도 기대한다. 예수의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이러한 병을 고치는 힘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졌다는데, 그 중 누가(Luke)는 원래가 의사로서 그의 사후에 그의 유골이 병을 치유하는 힘이 있고 그래서 그 유골의 힘을 빌려 자신의 구역 교회의 신도를 늘리려고 누가의 유골을 자신들의 교회에 놓으려는 경쟁이 벌어졌다한다. 동시에 같은 유골이 여러 곳에 있다고 광고되었는데, 그들 중 많은 수는 가짜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각각 치유력을 발휘했었다한다. 현재도 한국은 많은 환자들이 일부 개신교 목사, 무당에게서 병을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종교인에게 있던 병에 대한 치유력에 대한 기대는 그 후 왕 같은 현실 세계의 실력자에게 있다고 믿어져왔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중세 시대 수 백년간 왕이 환자들을 치료 해 주었다.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수 백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기대는 현재는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왕이 환자를 치료하려하지도 않고, 환자들도 왕에게 치료를 받겠다고 하지도 않는다.
최근의 실험적 연구들은 기대가 생각보다 더 강력한 치유효과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 중 반복된 연구는 아니지만 기독교의 신에 대한 믿음이 요통, 관절 통등의 만성 동통에서는 67%, 우울, 불안, 두려움, 분노 등에서는 77%의 치유력을 보였다고 한다(Benson, 1996). 비록 이 결과가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한 반응 즉 믿음요인(faith factor)을 측정했다고는 하나, 여기에서의 신에 대한 믿음이 치유력에 대한 기대라고 볼 때 기대의 효과는 예상보다 높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믿음에 의해 호전된 증상들이 모두 최면치료의 주요 적응증의 하나라는 점이다. 즉 믿음, 기대 모두 최면 현상을 매개로 한다는 증거의 실마리로 볼 수 있다.
기대는 최면에만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기대 자체가 최면 현상을 유발하기 때문에 최면치료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요인이다.
암시 - 암사 효과가 극대화 된다.
암시(暗示)는 suggestion을 번역한 말이다. Suggest는 'to mention as something to think over; to bring to mind; to propose as a possibility; to show indirectly' 등의 뜻으로 적혀져있고 일반적으로 'a putting of something into the mind either intentionally, as by way of a proposal or unintentionally, as through association of ideas'를 의미한다고 한다(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1988).
暗示의 암은 어둡다, 몰래의 뜻이고; 시는 보이다, 가르치다, 알리다는 뜻이다. 즉 어둡게 알려준다, 몰래 알려준다는 뜻인데 누가 언제 이렇게 번역하여 썼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일본의 번역이나 중국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지는데 사실 이 말은 적절치가 않다. 그들이 이 말을 쓴 것은 아마도 최면 중에 눈을 감고 있으니 대상인으로서는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 말 해준다해서 그랬는지, 혹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면을 할 때 어둡게 해놓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유래하였는지, 혹은 최면후에 대상자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잊는 수가 있지만 들었던 대로 따라하는 것을 보고 그런 의미에서 대상인은 모른다는 그래서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즉 몰래 혹은 암암리에 말을 해 준다는 뜻에서 썼는지 등으로 추정을 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이미 용어가 정해져 있으니 달리 바꿀 수도 없어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최면에서의 암시란 최면을 통해 대상자에게 전해지는 모든 말을 의미한다. 물론 말을 통하지 않더라도 치료자의 행동 - 말투, 표정, 제스츄어 등등 - 이 대상자에게 함축적 의미를 전달하게 되고 이러한 것도 넓은 의미로 보면 암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암시란 최면에서 해주는 모든 말 그 중에서도 특히 최면 유도 후에 즉 최면 상태라고 추정되어지는 시간 동안에 환자에게 주어지는 말을 의미한다.
암시에는 크게 보아 직접 암시와 간접 암시가 있다. 직접 암시란 목표 증상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말 즉 암시이다. 예를 들어 불안이 차차로 감소하게 될 것이라든지, 우울한 느낌이 점점 사라 질 것이라든지 하는 것 등이 직접암시이다. 간접 암시는 직접 그 증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그 증상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안이나 우울이 없어지고 편안함이 느껴 질 것이다라는 말 대신에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듯이 새로운 정신이 자라나기 시작 할 것이라고 말 해 주는 것이 간접 암시이다.
20세기 초반까지의 최면에서의 암시는 모두 직접 암시였었다. 최면을 처음 공부 할 때 나는 직접 암시는 효과가 지속되지 않고 재발도 잦다고하여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설마, 적어도 웬만한 병이라면,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말로 고쳐 질 수 있을까 생각하였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직접 암시의 효과는 때로 너무나 강력하여 의사인 나 자신도 놀라는 경우가 자주 있다. 즉 10 년 이상을 불안 속에 살아오면서 수많은 치료에 반응하지 않던 불안장애 환자가 최면치료 첫 시간에 그저 단순히 불안이 차차로 없어질 것이다라는 나의 말 한마디에 그 다음주 최면치료 시간에 와서 정말로 불안이 많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일이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이러한 직접 암시를 자주 쓰게 되었는데 이러한 극적인 효과는 최면의 직접 암시만이 가지는 것 같다.
19세기까지는 이 것만이 최면의 무기였다. 그러나 이 직접암시의 효과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직접암시에 의해 효과를 보았던 환자도 대부분, 약 90% 정도, 는 얼마안가 다시 증상이 생긴다. 현대 최면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은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이 최면은 재발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세기 전반의 정신의학에서 정신적인 측면은 특히 미국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들이 최면으로 치료하면 재발하고 근본적 치료를 위해서는 정신분석치료를 해야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최면은 직접 암시만을 최면 유도 후에 주입하는 치료법으로 알고 있기 때문 인 것으로 여겨진다.
20세기 후반기에는 간접 암시가 개발이 되기 시작하여 보다 지속적인 효과를 얻게되고 여기에 행동의학적, 역동적 개념을 추가하여 효과의 지속 및 재발의 방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암시는 어떤 학파는 최면을 암시라고만 정의(Nancy School, 19세기 후반)하기도 할 정도로 최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데 특히 최면감수성이 높은 환자들에서는 단 몇 마디의 말이 병의 근본적인 흐름을 바꾸는 경험을 자주 한다.
최면후암시(催眠後暗示; posthypnotic suggestion)이란 넓은 의미로는 최면 후의 어떤 특정한 반응을 기대하면서 최면 중에 해주는 말을 의미한다. 즉 최면이 끝 난 뒤에 나에게 물을 한 컵 달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든지 등등 아무 내용이라도 최면후암시가 될 수 있다. 치료에서 자주 쓰이는 최면후암시의 예로서 최면 시간이 끝 날 때쯤 해서 '다음 치료시간부터는 훨씬 빨리 최면상태로 유도가 될 것' 이라든지, '다음 시간부터는 이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최면이 저절로 걸리기 시작 할 것' 이라든지 하는 말들을 사용하여 최면 유도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 할 수도 있다. 또한 '다음 시간까지 증상의 원인이 되는 정신적 갈등에 관 한 꿈을 꾸게 될 것' 이라든지 하는 말로서 치료의 보다 빠른 진전을 추구 해 볼 수도 있다.
넓은 의미의 암시에는 사회적인 암시도 있다. 즉 최면은 이러한 것이라든지 최면에 걸리면 어떻다더라 등등이 대상인에게 미리 무의식적인 최면에 대한 자세와 최면에서 취해야 할 행동 등에 대한 암시에 속한다.
암시의 효과는 암시성 즉 최면감수성이 높은 사람에서 더 크게 나타나며 그러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암시성이 낮은 사람들보다 더욱 쉽게 암시에 반응한다.
아직 암시성(suggestibility)의 생리학적인 기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뇌를 포함한 육체에 정신과 연결되는 어떠한 회로가 있을 것을 짐작은 하지만 그 생물학적 기전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보적이다. 이에 대하여 암시성에 대한 생리학적인 지표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몰입경 혹은 최면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파가 있다(Kirsh, 1999). 특히 최근에 실험 심리학, 사회 심리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러한 주장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최면은 오로지 기대와 암시이며 최면 상태라는 매개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한다. 즉 전통적인 최면치료가 최면유도 후 최면 상태에서 암시 등을 주어 그 효과가 나오는 것이라면서, 최면 유도나 최면 상태가 없어도 암시만에 의해서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즉 암시성만이 최면의 거의 전부라는 말이다. 이 들을 비상태론자라고 하며 이들이 벌이는 논쟁을 상태론(state theory)과 비상태론(non-state theory)의 논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대부분 비상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임상 경험이 부족하다. 그들이 임상 심리학자라고는 하나 나의 견해로는 상담 심리학자 혹은 실험 최면심리학자로 본다. 실제 심한 환자들을 접해 본 임상가라면, 상태 즉 최면 상태의 경험이 그 환자의 최면치료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최면 상태의 주관적인 경험이, 같은 진단의 같은 정도의 심한 정도의 정신질환에서, 최면치료의 예후와 과정에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최면 상태를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환자들이 최면치료를 받으러 의사에게 다닐 이유가 없다. 또한 비상태론자들은 최면 상태의 뇌파, PET, f-MRI등의 연구 결과를 알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최면은 암시에 대한 반응이 주이긴 하나 단순히 암시에 대한 반응만은 아니다.
최면치료는 진실한 인간관계에서 출발한다.
진실한 치료 효과는 자신이 현재 처한 현실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그 관계를 통해 감정적인 경험들이 교정될 때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교정 적인 감정 경험'은 대인관계의 치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최면치료에서는 의사와 환자와의 무의식적인 관계가 그 어떤 치료에서보다도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다. 최면치료 과정에서 무의식적인 관계가 잘 일어나는 것은 최면이 무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면치료의 세팅(Setting)을 보면 환자는 의자에 앉거나 누워서 눈을 감고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데, 그 말들은 환자를 편안하게 하고 병이 낫도록 하는 말들이다. 최면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 환자는 최면 상태가 되므로 '아! 편안하구나. 이제 살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자장가를 듣는 듯한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 또한 어떤 경우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흔들듯이 의자가 흔들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어 그 감정이 더욱 증폭되기도 한다.
마음의 병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원했던 것의 좌절, 뜻하지 않았던 상처,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할 수 없었던 두려움 등이 병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불안신경증, 공포신경증, 해리장애, 성격장애, 정신분열병 등 대부분의 마음의 병은 그 마음의 구조를 파악하여 재건시켜 주어야만 근본적으로 좋아질 수 있다. 특히 최면은 인간관계의 무의식적 측면을 증폭시켜 주는 특이성 때문에 무의식적인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병의 치료에 효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