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되는 부모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뿌린 감정과 정신의 씨앗이 자라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그 씨앗이 어떤 가정에서는 사랑과 존경, 그리고 독립심 등의 형태로 뿌려지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공포와 속박 그리고 죄책감으로 얼룩진 형태로 뿌려진다.

어떤 부모든 가끔씩 부족한 면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몇 가지 엄청난 실수를 한 적이 있을 것이며, 아이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늘 안정되어 있는 부모는 없다. 어떤 부모든 아이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 들 때가 있고, 때릴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실수들이 늘 아이에게 잔혹한 게 되고, 부모를 모두 몹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부모도 인간이기에 자신만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가끔씩 분노의 대상이 될 뿐, 대부분의 시간은 사랑과 이해 속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그런데 아이의 삶의 죄지우지하려고 들면서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군림하려고 드는 부모들도 많다. 이런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해를 끼친다.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부모들을 적절하게 표현하려고 고심하다가 문득 한 단어가 생각났다. 바로 '독'이라는 단어였다.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는 유독성 화학물질과 같이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침투해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 고통을 주고, 그 아이가 부모가 되면 자신의 아이에게 다시 상처를 입힌다. 특히 신체적인 학대는 너무나 큰 상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번의 경험으로도 무시무시한 감정적인 상처를 남긴다.

어릴 때 매를 맞으며 자랐든, 바보 취급을 받으며 자랐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자랐든, 과보호 속에서 자랐든, 과도한 요구를 받으며 자랐든, 독이 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한결같이 삶이 괴롭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며, 허무적이고, 사랑할 줄 모르며, 삶에 대해 무력하다.

독이 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부모에게 따진다거나 부모를 무능하다고 생가가하는 것보다 자기를 탓하는 게 쉽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과거의 상처를 계속 품고 살기 때문에 긍정적인 자아를 갖기가 극히 어렵다. 이렇게 어릴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나 가치를 상실한 사람은 살면서 여러 가지 고통의 스펙트럼을 보인다.

부정은 가장 원시적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심리적인 방어기제로,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에 근거해 현실에 대한 판단력을 떨어뜨리거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지게 만든다. 심지어 부모가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리고 존경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부정을 하면 일시적인 안도감을 얻는 대신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부정은 우리의 감정적인 압박을 토대로 하는데,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 큰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얼마 못 가 주저앉게 된다. 부정이라는 방어가제를 사용해야 했던 위기를 넘긴다 해도, 그동안 그렇게도 피해온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독이 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부정을 함으로써 지난 일을 별 일 아닌 것으로 만들거나, 무의식적인 과정을 거쳐 어떤 사건과 느낌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치워버린다. 아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좀 더 정교한 방어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바로 합리화다. 합리화란 고통스럽고 불편한 내용에 대해 '그럴 듯한 이유'를 내 세워 회피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모두 빼앗겼어요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능한 부모

아이들에게는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 먹을 권리, 입을 권리, 잘 곳을 가질 권리, 보호 받을 권리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인 권리 이외에 감정적으로 소중하게 양육 받을 권리와, 정서적으로 존중 받고 자신에 대한 가치를 고양하도록 양육받을 권리도 있다. 또한 자신의 요구를 제한할 줄 알고, 실수를 줄이도록 애쓰며, 아이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학대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랄 권리가 있다. 마지막으로 아이다울 권리가 있다. 유아기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이다운 놀이를 하며 자연스럽게 자라야 하며, 그 어떤 의무도 가져서는 안 된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의 의무와 사랑하는 부모가 바라는 몇 가지 책임은 질 수 있지만, 적어도 유년기만큼은 그 어떤 이유로도 권리를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게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이혼은 없다. 이혼은 식구들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또 가족끼리 충분히 상의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혼을 하더라도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 아이들로 인해 인생에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아이들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혼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거나 좋지 않은 부모가 되어도 좋다는 면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이혼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공허감과 상실감을 안겨줄 뿐더러 아이의 인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만약 아이에게 어떤 부정적인 면이 나타난다면 가족 내에 좋지 못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기 바란다. 그리고 아이들은 가족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는 것도 기억하기 바란다. 특히 이혼한 부모의 아이들은 자기 잘못을 부모의 잘못과 연결해 생각하기 쉽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바람직하지 않은 부모는 아이로 하여금 살다 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이나 상실감조차도 지나치게 강화시켜 병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결과 엉뚱하고 잘못된 믿음을 갖도록 만들 수 있다.

부모님은 왜 내 뜻대로 살게 두지 않는 걸까

자식을 조종하는 부모

아이로 하여금 혼자서 행동하고, 탐구하고, 실패를 감수하고, 체특하지 못하게 하면 아이는 끊임없이 도움을 구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자신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아이에게 끊임없이 간섭하는 부모는 아이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살게 만든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는 동안 계속 간섭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무의식적으로 간섭 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부모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자기들 뜻대로 아이를 조종하게 된다.

독이 되는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어쩔 수 없는 아이거나 모자라는 아이로 여기는 것으로 아이에게 간섭하려 든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데도 말이다.

드러내놓고 간섭하지 않고 은근히, 미묘하게 간섭하는 부모가 있다. 상처를 주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그런 부모는 자식에게 간섭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뭘 바라는지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거부당할까봐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간섭하고 싶다고 해서 간섭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자기 의사를 밝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조종한다면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더욱 그렇다. 자식을 조종하는 부모는 자신이 그러는 이유를 감추기 때문에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혼돈스러운 세계에서 자라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러는 부모도 많다.

남을 조종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험한 부류는 '도움을 주는 사람(조력자)'이다. 조력자인 부모는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지 않는다. 자신이 아이의 인생에 꼭 필요하도록 상황을 묘하게 만들어나간다. 살면서 부모가 꼭 필요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자식을 조종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호소한다. 조종당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마치 '잘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식을 조종하려 드는 부모는 주로 특별한 날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죄책감이 더 들게 만드는 것이다. 즐거워야 할 날 기분을 망치다 보면 다시 그날이 오는 게 싫어진다.

독이 되는 부모 가운데 많은 수가 자식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써서, 특정한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든다. 어떻게 해서든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지나치게 튀는 아이도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 수 있고, 가족과 화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잔인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경쟁의 조장은 아이로 하여금 정상적이고 건강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없게 한다. 아이의 건강한 자아상에 상처를 입힐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경쟁심으로 인해 질투와 적대감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독이 되는 부모가 아이를 조종하기 위해 죄책감을 유발시키거나 정서적으로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면, 그 아이는 대개 다음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부모에게 항복해버리거나 반항을 꿈꾸는 것이다. 반항을 계획하는 게 부모를 거역하는 것 처럼 보이기는 해도, 이 두 가지 반응 모두 소외당하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반항이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을 말한다. 건강한 반항은 개인을 성장시키고, 주체성을 신장시킨다. 반면 자기 파괴적인 반항은 자식을 조종하는 부모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 한다.

부모가 죽은 뒤에도 부모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반항이나 항복을 계속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죽으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심리적인 탯줄은 끊어지지 않는다. 나는 부모가 죽은 뒤에도 부모의 영향력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부모는 자식을 조종하려 들지 않는다. 독이 되는 부모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심지어 자식들에게 무시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주체성을 갖고 독립하려고 하면 마치 자신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더 독립적이 될수록 독이 되는 부모의 압력도 점점 더 거세진다. 독이 되는 부모는 아들딸이 오래도록 어린아이로 남아있게 하려고 고삐를 쥘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자아와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다. 부모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해 자신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와 부모의 욕구를 구분하지 못해 무기력해진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조절하지 못하는 한 독이 되는 부모의 간섭은 계속될 것이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면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에만 그런 혼란을 느낀다. 반면 독이 되는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는 건강한 독립을 위한 진통을 아예 겪지도 못하나 반대로 언제까지나 그런 진통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 집에 알코올 중독자는 없어요

알코올 중독자인 부모

알코올 중독자는 가족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해 식구들로 하여금 비밀을 간직하게 만든다. 이런 행동은 아이들에게 극도의 감정적 혼란을 안겨준다. 부모가 알코올 중독자인 가정의 분위기는 부모가 약물 중독인 가정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인 가정'처럼 생활하는 것은 특히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아이로 하여금 정상적인 감정과 진실을 토대로 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부정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아이가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아이는 죄책감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게 된돠. 그런 생각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지속되기 때문에 부끄러워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가장하려면 굉장히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아이는 늘 긴정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칫 가족의 비밀을 말하게 될까봐 공포에 떤다. 그래서 아예 친구를 사귀지 않으려 들고, 결국 스스로 고립되어 외톨이가 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다 비슷한 비밀이 있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림으로써 왜곡된 의식까지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 부모에 대한 무비판적인 행동양식은 아이에게 제1의 천성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조종당해야 편안해지는 이 파괴적인 제2의 천성으로 인해 아이는 살아가는 내내 고통 받게 된다.

독이 되는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는 늘 역할이 바뀐다. 특히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서는 술을 마시는 부모가 끊임없이 비합리적이고, 연민을 자아내는 행동을 함으로써 아이로 하여금 부모 역할을 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를 귀찮은 존재로밖에 대접하지 않는다.

많은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들이 알코올 중독자와 결혼한다.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가정에서 자라는 동안 혼란스러워진 아이들은 어떻게 상처를 치유받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현 상태가 아무리 나빠도, 오랫동안의 습관 때문에 변화에서 오는 불안이 두려운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을 교정하기 전까지는 과거의 고통을 반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노력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가 가진 힘 때문에 지켜질 수 없는 또 다른 약속이 있다. 알코올 중독자 가족이 자신이 받은 난폭함과 학대를 남에게는 결코 행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다.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들 대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알코올 중독자 자식들 중 많은 수가 어릴 때부터 술을 마시다가 결국 자신도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함께 술을 마신다는 사실이 끈끈한 정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공범이 되고, 더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도록 서로를 부추기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부모와 더 가까워지는 거라고 착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이 된 후에도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게 된다.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들은 어른이 되면 화를 잘 내고, 우울증에 걸리며, 즐거움을 모르고, 남을 의심하기 쉬우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기 쉽다. 게다가 모든 잘못의 근원인 술을 아주 쉽게 가까이 함으로써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알코올 중독자 가정은 자녀들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맺는 걸 이상한 쪽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가장 사랑하고 믿을 만한 존재인 부모가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며 때리고,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하며, 기괴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는 걸 몹시 두려워한다.

독이 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신뢰다.

질투와 피암시성, 의심은 알코올 중독자 자녀들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늘 문제가 되는 주제다. 일찍부터 인간관계란 배신과 고통만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부모는 흔히 똑같은 것을 놓고 하루는 옳고 하루는 못되었다고 야단을 친다. 규칙과 원칙이 너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아이들은 늘 긴장하며 산다.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부모는 아이를 조종하려고 아이를 비난한다. 아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김없이 비난거리를 찾아내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다. 자신의 잘못을 그런 식으로 은폐하면서 아이를 속죄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네가 잘못하지 않으면 엄마가(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을 텐데."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속죄양이 되기 때문에 부정적인 자아상을 부수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거나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정서적인 증상이나 신체적인 증상을 만들어 자신에게 벌을 주려고 한다.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서는 아이가 희생양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집안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런 아이는 부모로부터 온갖 찬사를 다 받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속죄양이 된 아이보다 나아 보이지만, 정상적인 애정과 건강한 심성을 발달시킬 기회를 박탈당하는 건 둘 다 마찬가지다. 그런 아이들은 무엇이든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높은 목표를 세우고 무작정 덤벼들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여러 가지 곤란을 겪는다.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들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분위기에서 시련을 겪으며 자란다. 그런 분위기에 일일이 대처하기 어렵다 보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았어요

잔인한 말로 상처를 주는 부모

좋지 않은 뜻이 들어 있는 별명을 부르거나 인격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거나 얕잡아 보는 투의 비난은 아이로 하여금 극도로 부정적인 자아상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이런 좋지 않은 메시지는 아이의 미래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간혹 아이에게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말로 하는 학대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반면 아이의 외모나 지적 능력, 경쟁심 혹은 인간적인 가치의 차원에서 심한 말을 자주, 그리고 심하게 하는 것은 분명 학대다.

긍정적인 유머는 가족의 결속력을 높여주지만 부정적인 농담은 식구들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농담조의 비난과 우스갯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서'라는 미망하에 서슴지 않고 아이에게 언어적인 학대를 가한다. 그러면서 잔인함과 모욕감을 주려는 의도를 감추려고 "좀 더 나은 사람으로 키우려고 그런 겁니다."라거나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미리 격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한다. 교육이라는 명분하에 이런 식으로 언어적 학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이 상처 받았다는 사실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다.

건강한 부모는 자녀가 자라는 것을 들뜬 마음으로 지켜보며 기뻐한다. 반면 경쟁적인 부모는 자녀가 자라는 걸 지켜보며 상실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심지어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부모들은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모르는 채 자식이 자기를 괴롭힌다고만 생각한다.

경쟁적인 부모가 어떤 방식으로 아이에게 제재를 가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식이든 자식이 자신에게 덤비는 꼴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말로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대놓고 잔인한 모욕을 주거나, 끊임없이 잔소리를늘어놓거나, 협박을 하거나, 좋지 않은 뜻이 담긴 별명을 계속해서 불러서 아이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아이가 받을 충격과 고통, 상처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이런 식의 언어적 학대는 아이로 하여금 자신감을 잃게 하고, 자존감을 무너뜨리며,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부모로 하여금 아이에게 심한 말을 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자기 아이가 완벽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는 경우다. 심한 말을 하는 부모들을 보면 대개 성취 욕구가 큰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정작 가정은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한다. 완벽을 꿈꾸는 부모들은 자식들이 완벽해지기만 하면 가정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착각하며 산다. 정작 부모 도리는 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만 완벽해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가정의 모든 문제를 덮어 씌워 속죄양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은 실수할 권리가 있다. 고작 그깟 실수 때문에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어야 아이들이 새로 시작하는 법을 깨우치고, 좌절을 딛고 일어설 힘이 생긴다. 하지만 독이되는 부모들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와 불가능한 기대, 수시로 바뀌는 원칙으로 아이들을 몰아붙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살아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른스러움을 요구히기도 한다. 아이들이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성공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늘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삶이 언제나 실패의 연속이다. 성공이라는 단어의 테두리에 갇혀 헤어나지오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친구와 선생님, 동료, 그리고 다른 집의 식구들을만나면서 그동안 모르던 것을 많이 배우게 된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 결국 부모가 아이들의 중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에게 나쁜 감정이나 평가를 내리면 아이는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늘 아이에게 "너는 바보야." 라고 말하면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바보가 되는 것 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너는 가치 없는 인간이야."라고 말하면 아이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내린 평가를 의심하거나 진실을 규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신체적, 성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거나, 성가시게 굴거나, 반항할 때 강하게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충동은 아이의 행동과는 상관없고, 부모가 느끼는 피곤과 스트레스 정도, 불안이나 불행과 관련이 있다.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무력감과 상당한 감정 결핍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성인기로 접어든다. 감정적인 면에서 아직도 어린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대리 부모로 착각하고, 실제 부모가 결코 채워주지 못했던 감정적 욕구를 충족하려 든다. 그러다 자식이 자신들의 욕구에 미치지 못하면 욕을 퍼붓고, 화를 낸다. 그 순간, 어린 자식은 더 이상 자녀가 아니다. 왜냐하면 가해자가 진정으로 화를 내고 있는 대상은 가해자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짓밟히고 나면 신뢰와 안도감을 회복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자신과 부모의 관계를 기초로 해서 예측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권리와 감정을 존중해주는 그런 관계였다면, 남들도 우리에게 그런 방법으로 잘해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자식이 자기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때리고 나서 이해해달라고 빌며 용서를 구한다.

아이들을 심하게 체벌하는 게 옳다고 믿는 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매질은 단지 일시적으로 아이들을 저지할 뿐, 아이들에게 심한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자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신체적인 학대로 인한 정신적, 감정적, 신체적 손상은 일시적인 이점은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자신이 먼저 절망감에 압도당해 폭력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부모는 자신이 학대에 공모했다는 사실을 쉽게 부정하려 든다. 이러한 자기 합리화 때문에 학대를 받은 어린 아이로 하여금 양쪽 부모 모두가 자시늘 실망시켰다는 사실을 부정하도록 만든다.

매 맞는 아이들도 폭언을 당하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는 폭력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너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어린아이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강력하고 전지전능한 아버지가 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아이로서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어린 시절에 매를 맞으며 자란 성인들의 가슴속에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남는다.

학대 당하는 어린 아이들의 가슴속에는 분노의 냄비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 누구도 이 분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매를 맞는데 누군들 화나지 않을 것이며, 굴욕스럽지 않을 것이며, 자존심 상하지 않을 것이며, 고통에 울부짖지 않겠는가? 문제는 매 맞는 어린아이들일 그 엄청난 분노를 정상적으로 표출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해결하기 어렵다.

억압된 분노는 대개 구타나 강간, 살인 같은 폭력적인 범죄 행위로 나타난다. 감옥은 어린 시절에 신체적으로 학대 받은 분노를 적절히 표현하는 법을 한 번도 배우지 못한 어른들로 가득하다.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와 매 맞는 자신을 동일시하는아이들도 있다. 가해자와 똑같은 특성을 갖게 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거라는 환 상을 갖는 것이다. 가해자는 강력하고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적 자기 방어로서, 병든 부모가 갖고 있는 특성, 즉 자신이 가장 증오해온 바로 그 성향들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부모를 닮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는데도 가해자와 아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근친상간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절망적이다. 어린아이와 부모 사이에 존재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어린 피해자는 자신을 공격하는 부모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잇는 상태여서 도망칠 곳도 없고, 도망칠 능력도 없다. 보호자가 가해자이므로, 현실은 더러운 비밀을 품고 있는 감옥이 된다. 근친상간은 유년기의 본질, 즉 순수를 말살해 버린다.

근친상간은 상당한 정서적 격리와 비밀, 빈곤, 스트레스가 있고, 서로 존중할 줄 모르는 가정에서 일어난다. 근친상간은 여러 면에서 총체적인 가정 붕괴의 일부로 여겨질 수 있다.

근친상간 피해자의 90퍼센트는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괴로움을 당할까봐 두려워서뿐만 아니라 부모를 곤경에 빠뜨려 가족을 파괴할까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을 당한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 두려울 수도 있다. 아무리 부정한 가족이라 해도 가족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마음은 어린아이들의 삶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근친상간 피해자가 갖는 수치심은 굉장하다. 아주 어린 피해자라도 근친상간이 비밀스러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비밀을 지키라는 말을 들었든 안 들었든 간에 가해자의 말과 행동 속에서 금기와 수치심을 감지하는 것이다. 성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기는 해도 자신이 폭행 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자신을 불결하게 생각한다.

많은 수의 근친상간 피해자들은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여전히 병든 부모와 결속되어 있다. 고통이 부모로부터 왔는데도 그 고통을 이기겠다면 여전히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평생 가족의 비밀을 지킨다. 피해자는 가족이라고 하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서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과 갈등 때문에 피해자가 식구들 가운데 누구보다 먼저 도움을 청하게 된다. 반면에 피해자의 부모는 자신들의 행동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숨어 지내면서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체 부모들은 왜 그러는 걸까

병든 가족 체계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고 하는 이름의 가혹한 시련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가족은 사랑과 질투, 위엄, 불안, 기쁨, 죄책감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조직으로, 구성원의 감정 전체를 좌우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가족 구성원들의 태도와 인식, 그리고 관계의 심연에서 솟아 나온다. 그리고 가족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 가운데 빙산의 일각처럼 극히 적은 부분만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당신이 어렸을 때는 가족 체계가 곧 당신의 현실이었다. 당신의 가족 체계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당신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누구이고,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해야하는지를 결정해왔다.

병든 가족 체계 내의 혼돈과 무질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먼저 가족의 신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부모가 자녀들과 어떤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 그리고 자녀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합리적이고, 성숙하고, 남을 잘 배려하는 부모는 가족 구성원의 감정과 욕구를 고려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발달과 아이가 성장한 후의 독립을 대비해 탄탄한 기초를 마련해줄 것이다. 이런 신념은 '아이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자식을 고의로 상처받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믿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독이 되는 부모의 신념은 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 이런 부모들은 '아이는 부모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아야 한다', '오직 내 방식만 옳다' , '아이는 말로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 등의 신념만을 믿는다.

독이 되는 부모는 자신들의 신념이 위배되는 외부 현실에 저항한다.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는 대신 신념을 수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왜곡된 관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이들에게는 진짜 현실과 왜곡된 현실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부모의 왜곡된 신념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고, 성인이 되어서도 왜곡된 신념을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아간다.

아마 세상에는 부모 수만큼 많은 신념들이 있을 것이다. 이 신념들은 이 세상을 보는 우리의 지적 인식을 골격이 된다. 이 골격에 붙은 살은 우리의 느낌과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이 되는 부모가 자식에게 왜곡된 신념을 물려주면, 우리의 느낌과 행동은 그 신념을 받치고 있는 골격만큼이나 삐뚤어져 버린다.

부모가 만드는 규칙은 부모가 믿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신념의 경우처럼 부모의 규칙도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다. 그러므로 규칙은 신념의 표현이다. 규칙은 단순히 '된다, 안 된다'라고만 하는 집행자일 뿐이다.

신념이 가족 체계이 골격이고, 규칙이 살이라면 '맹목적인 복종'은 그 몸을 움직이게 하는 근육이다. 우리는 가족의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가 되기 때문이다. 국가나 정치적 이상, 종교에 대한 충성심은 가족에 대한 충성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충성심을 갖고 있다. 이 충성심은 가족 체계와 부모, 부모의 신념에 우리를 종속시킨다.

맹목적인 복종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양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든다. 부모의 기대나 욕구, 우리가 자신을 위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서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불행하게도 복종에 대한 무의식적인 압력이 늘 우리의 의식적인 욕구와 소망을 가로막는다. 무의식에 불빛을 비추어 그 속에 있는 규칙들을 표면에 드러내야만 그 파괴적인 규칙들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 규칙들을 명확히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건강한 가족 체계와 병든 가족체계 사이에 유일하다고 할 만큼 큰 차이점은 가족 구성원들이 개인으로서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얼마나 허용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건강한 가족은 가족 구성원에게 개성과 개인적인 책임감, 독립심을 북돋아주고, 아이들이 자존감을 키울 수 있도록 격려한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가정은 개인의 표현을 묵살한다. 가족들 모두 독이 되는 부모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야 한다. 이들은 서로 뒤엉켜, 각 개인의 영역을 모호하게 만들고, 결국 가족 구성원을 하나로 뭉뚱그려버린다.

얽혀 있는 가족 안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안정감을 느끼려면 자아를 말살해야 한다. 얽혀 있는 가족 안에서 구성원은 구성원 자신이 아니라 가족 체계의 부속품일 뿐인 것이다.

아이들은 얽혀 있는 감정에 의존해 자아를 찾고 안정감을 얻으려는 환상을 갖는다. 다른 사람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욕구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욕구를 함께 키워나가면서도 버림받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뒤엉키려는 욕구가 성인이 되고 난 다음의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얽힘은 외부에서 자신을 인정해주고 확인해주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든다. 연인이나 상사, 친구, 심지어는 처음 보는 사람조차 부모의 대역이 된다. 독립된 인격체가 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어른들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남의 인정을 갈구하게 된다.

'균형'이라는 단어에는 평온과 질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병든 가족 체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외줄을 타는 일과 같다. 그러한 가정에서 혼돈이 삶의 방식이며,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독이 되는 부모는 가족의 균형이 깨지는 걸 막기 위해 더욱 큰 혼돈을 만들어 낸다.

가정이 병들면 병들수록 조그마한 불균형도 가정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독이 되는 부모가 가정에 조그마한 궤도 이탈만 생겨도 자신들의 삶이 위기에 처한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이 되는 부모들 대부분은 부정과 비밀, 그리고 가장 좋지 못한 비난으로 위기에 맞선다. 그리고 비난은 늘 아이들에게 가해진다.

제 기능을 하는 가족의 경우, 부모들은 삶에 어려움이 닥치면 마음을 열고 대화하면서 여러 가능성열어두고 문제를 풀어나가며,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외부의 도움을 받는다. 반면 독이 되는 부모는 자신들의 두려움과 좌절감을 폭발시켜 자신들의 균형 상태를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하려 들며,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부정은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와 '좀 잘못되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가 그것이다. 부정은 파괴적인 행동을 최소로 줄이고, 의미를 축소하며, 비웃어버리고, 합리화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린다.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것은 부정의 한 형태로서,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음주'가 되고, 구타는 '엄격한 훈육'이 되어버린다.

투사 역시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부모는 자신들이 무능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무능함 때문에 하게 되는 해로운 행동들을 아이들 탓으로 돌리고 아이들을 나무란다. 독이 되는 부모는 자신의 행동과 부족함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이 두가지 면을 모두 사용한다. 속죄양이 필요해진 그들은 식구들 중에서 가장 약한 아이들을 속죄양으로 삼는다.

병든 가족 체계에서는 한쪽 부모가 아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아이는 건강하지 못한 삼각관계의 일부분이 되고, 부모는 이제 서로 아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압력을 한다. 어머니는 "난 아빠 때문에 불행하단다."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네 엄마는 더 이 상 나와 함께 자지 않을 거다."라고 말한다. 이때 아이는 정서적인 쓰레기장이 되고, 부모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 직면하고도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독이 되는 부모는 아이들로 하여금 비밀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가정을 아무도 근접할 수없는 작은 사조직으로 만든다. 이를 통해 가족을 하나의 끈으로 단단히 묶은 다음 가족의 균형을 위협하는 것에 맞서도록 한다. 부모에게 얻어맞고도 선생님에게는 계단에서 굴렀다고 말하는 아이는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해는 변화의 첫걸음이다. 새로운 선택의 시작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볼 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자유는 다르게 '행동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용서하지 말라

용서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복수하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는 것이고, 하나는 책임감에 뒤따르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되갚아주고 겠다는 욕구를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복수심은 매우 정상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부정적인 공기다. 복수심은 만족감을 되찾겠다는 강박적인 환상에 빠져들게 하고, 커다란 좌절감과 불행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서적인 평안에 이롭게 작용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용서의 나머지 한 면은 그렇게 명확한 게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당연한 책임을, 특히 그가 순진한 아이를 심하게 학대했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지옥으로 만든 아버지를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야말로 생각하면 할수록 부정의 또 다른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내가 당신을 용서하면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다지 끔찍한 일이 아니니 게 된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이다.

용서의 가장 위험한 면은 꽉 막혀 있던 감정을 발산할 기회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용서한 부모에게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책임은 두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가거나 자신에게 가는 것이다. 분명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부모'를 용서한 대가로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용서를 하더라도 정서적인 앙금이 완전히 가신 후에 해야 한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화를 낼 필요가 있고, 그토록 갈망했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용서하고 잊어라"라는 말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말과 똑같은 셈이다.

왜 아직도 어른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걸까

얽매임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재 유형은 분노를 달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부모의 의지에만 따르는 것이다. 스스로의 필요나 욕구는 뒷전이고 부모의 필요와 욕구가 늘 먼저다. 두 번째 유형은 이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대들고, 부모를 협박하고, 부모와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만큼 부모에게 얽매여 있다는 뜻으로, 부모가 당신이 느끼고 행동하는 데 아직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강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부모에게 당신을 쥐고 흔들 힘을 주는 것이며, 당신을 조종하라고 허락하는 것이다.

믿음은 깊이 뿌리박힌 태도, 지각, 사람들에 대한 관념과 관계, 그리고 도덕성이다. 삶이 발전하고 변화하려면 반드시 그릇된 믿음과 부정적인 느낌, 스스로를 망치는 행동들의 상호 관련성부터 알아야 한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가운데 감정은 그 사람 스스로가 '선택'해 느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느끼게 '만들'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는 어떤 감정을 느끼기로 결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누가 당신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면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할 책임이 있듯이, 당신의 부모도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면 스스로 좋아지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감정을 위해 욕구를 무시하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해가 된다. 어쩔 수 없이 분노를 느끼게 되어 어머니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면 죄책감과 함께 부당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부모의 감정이 늘 우선한다면 부모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부모처럼, 당신으로 하여금 온전한 성인이 된 기분을 못느끼게 하는 믿음은 없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들은 감정이 외부에서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극도의 공포나 즐거움 혹은 고통까지도 실제로는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싫은 감정을 강하게 표출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벌을 받았거나 너무 고통스러웠다면 그 감정을 무의식 속으로 깊이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부모도 그 깊은 곳까지는 손을 뻗칠 수 없으니 이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른이 된 지금 갑자기 정서적인 물꼬를 트기가 몹시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강렬한 감정과 과거와의 연관성, 그리고 현재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마주하기는 더욱 어렵다.

갇혀 있던 감정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하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감정이 되살아나서 한동안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정서적인 수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수술이 그러하듯이 낫기 위해서는 상처를 먼저 깨끗이 해야 한다. 통증이 사라지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리고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치유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믿음은 규칙을 만들어 내며, 감정은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복종해 행동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만일 당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이 등식을 알아야 하며, 규칙을 변화시키려면 당신의 믿음과 감정을 변화시켜야 한다. 행동이 믿음과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오랜 시간 몸에 밴 자멸적인 행동양식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을 옭아매고 있는 믿음과 스스로를 망치는 행동에 맞서고 떨쳐내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을 되찾으려면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정서적인 독립이란 부모와 관계를 끊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분리된 인격체임과 동시에 가족의 일부가 되는 걸 뜻하고, 당신이나 부모 모두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걸 뜻한다. 당신이 부모와는 별개로 자신이 믿고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면, 당신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부모는 당신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신도 부모가 당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더라도 참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이 부모와 똑같이 믿거나 부모가 인정해주기 바라는 행동을 하더라도, 자유롭게 부모에게 찬성하거나 반대하고 결정은 반드시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거나 당신의 행동이 부모에게 끼치는 영향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당신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을 돌보는 것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는 것 이 두 가지 면에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누구나 백퍼센트 독립적일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사회의 일부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욕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누구나 정서적인 의존 욕구를 조금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열린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정서적인 상호의존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려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결정한 거라면 부모와 절출해도 나쁠 게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자기 고유의 정서적인 고결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에게 진실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위협 받거나 공격당한다고 느낄 때 가장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는 거의 모든 사람, 즉 연인이나 상사, 어린아이, 친구와의 관계에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에서 가장 강렬하게 일어난다. 반사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을 받는 데 의존한다는 뜻이다. 이는 아무도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때만 자기 자신을 좋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일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해서, 아주 작은 암시조차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사소하고 건설적인 비판조차도 실패로 받아들인다.

논쟁하거나 사과하고 설명하고 부모의 마음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순간, 당신은 많은 힘을 부모에게 나눠주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부모가 당신을 용서하고 이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에게 당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미루는 힘을 주는 게 된다. 당신이 비방어적으로 대응해 부모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야 당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

선택이란 자신으로 하여금 정의를 내리게 해주는 열쇠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간에 선택에 따른 결정은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해준다. 대안을 생각해본 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 항복을 '선택하는' 것과 무기력해서 '자동적으로' 항복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 조종간을 잡으러 다가가는 발걸음이며, 반사적인 반응은 남에게 조종당하는 길이다.

정말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당신 부모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향이 있었나 없었나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무능한 부모에게 해를 입은 거라면 그럴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무능한 부모라면 부모가 행한 것들과 행하지 않은 행동 모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분노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 있다. 자신의 분노로 인해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분노를 잠재우지 못할까봐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누구든 이런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분노할 때가 아니라 분노하지 않을 때 더 나쁜 일이 일어난다.

즐거움이나 공포처럼 분노도 감정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 자체가 하나의 감정이다. 분노는 당신 것이고, 당신을 한 사람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당신의 일부다. 또한 분노는 당신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전하는 신호다. 지금 당신이 권리를 짓밟히고 있고, 이용당하고 있으며, 휘둘림을 당하고 있거나 욕구를 무시당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분노는 늘 무언가 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거나 욕설을 할 필요는 없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현하면 된다. 분노는 외면화하지 않는 한 다스릴 수가 없다.

당신 안에 있는 분노를 제대로 들여다보기만 해도 에너지와 생산성이 증가될 것이다. 억제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화를 냈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분노를 넘어서는 죄책감이 몰려올 수 있다. 그때는 큰 소리로 말하라.

"난 지금 화났어. 나도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분노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화를 내서 생기는 죄책감 따윈 아무래도 좋아.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나쁜놈이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분노는 부모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와 당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훌륭한 도구다. 분노는 당신의 경계와 한계를 알게 해준다. 분노는 오래도록 비굴하게 행동하고, 복종하고,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던 것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당신의 분노는 당신 자신에게 에너지를 돌려줌으로써 부모를 바꿔보겠다는 승산 없는 전쟁에서 헤어 나오게 해줄 것이다.

분노는 잘못된 대접에 대해 나타낼 수 있는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독이 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속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잇는 한계를 뛰어넘는 분노를 갖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애도 감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애도 감정이란 무언가 상실했을 때 나타날 수밖에 없고, 또 나타나야 하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당신도 어린 시절에 여러 가지 상실의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다.

당신이 지닌 애도 감정을 되살리려면 당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꼼꼼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그 느낌들로부터 풀려날 수가 있다. 애도 감정과 분노는 아주 단단하게 뒤어켜 있다. 마치 쌍둥치럼 어느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당신의 감정적인 상실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몰랐을 것이다. 독이 되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거의 날마다 이런 상실감을 감당한다. 때로는 모르는 척, 때로는 알면서도 억눌러가면서 말이다. 이런 상실감은 끔찍할 정도로 자존감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대부분 애도 감정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자존감이 무너지는 걸 모르는 척 하면서 자란다.

많은 사람들이 정작 무언가 상실했을 때 바로 애도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갑자기 나락에 빠진다. 때로는 1년쯤 뒤에, 아니면 별일도 아닌 일을 겪고서 갑자기 애도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가해자인 부모와 대면하라

독립하는 길

부모와 대면한다고 해서 부모가 당신을 인정해주거나, 사과하거나, 자신들이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이다.

독이 되는 부모가 사실을 직면했다고 해서 "그래, 모두 사실이다. 내가 너무 심했다." , "제발 용서해라" 혹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실과 정반대의 상황으로 표현한다. 그런 사실이 없다고 잡아떼거나, 잊어버렸다고 하거나, 어린 시절에 문제를 일으킨 걸 들먹이면서 되레 당신을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가 어떤 반응을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은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 작업은 당신을 위한 작업이지 부모를 위한 작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부모에 대해 올바로 알게 되는 걸 두려워한다. 우리 모두는 필요한 것을 부모로부터 못 받았다는 것과, 지금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걸 두려워한다. 하지만 부모와 대면하겠다고 하는 태도 변화는 모든 공포를 극복하는 일이다.

당신이 부모와 대면해야 할 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당신이 해결하지 못한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공포심과 죄책감과 분노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괴로운 감정들을 당신의 배우자나 자녀들에게 퍼붓게 될 것이다.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를 끌어안고 울먹이고 있다면, 아직 부모와 대면할 때가 아니다. 부모가 망쳐놓은 것들에 대해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책임에만 연연하고 있다면 부모와 대면할 수가 없다.

대면은 얼굴을 맞대고 할 수도 있고, 편지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화로는 아니다. 전화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화로 해서는 효과가 거의 없다. 부모가 전화를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화란 '인위적인' 물건이라 진정한 감정을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모와 만나기 어렵다면 차라리 편지를 쓰는 게 좋다.

부모를 한꺼번에 만나는 것과 한 사람씩 만나는 것은 그리 큰 차이가 없다. 나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독이 되는 부모는 가정을 온통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곳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시에 이야기해야 뒷말이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취향과 기대, 자기 방어 방법이 전혀 다르다면 한 사람씩 따로 만나는 게 낫다.

독이 되는 부모는 당신이 시작하면 대개 반격을 가한다. 당신의 말을 개인적 공격으로 간주하고, 오래 전부터 해온 방식으로 자신들을 방어한다. 무능하고 부족한 부모는 애처롭거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이게끔 한다. 알코올 중독자는 자신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조종하는 부모는 당신으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 자기 권리만 앞세우거나, 오히려 당신이 자신을 학대했다고 펄펄 뛸 수도 있다. 당신으로 하여금 복종적이던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반응이 아니라 당신의 반응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라. 격노하고, 비난하고, 위협하고, 죄책감을 유발하는 부모 앞에서 의연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잘못된 대면이란 없다. 대면은 독립으로 가는 여행길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부모와 대면하든 그전이나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부모와 대면했다는 사실만으로 당신은 이미 승리한 것이다. 집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고 올 수 없다고 하더라도, 준비한 말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바렸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해낸 것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당신 내면에 있는, 상처 입은 내면의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다. 이 일은 가장 중요하다. 당신이 내면 아이의 부모가 될 준비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탐구해 그 안에 있는 상처 입은 아이에게 사랑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부모를 찾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여전히 당신의 일부인 겁먹은 그 내면 아이를 보호해주고, 안심시켜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부모 말이다.

어린 시절에 성적 학대를 당한 사람들 대부분은 내면에 존재하는 아이와 사이가 좋지 않다. '더럽혀진' 불쌍한 아이에게 창피함 때문에 화를 내고, 그 아이를 미워한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이런 느낌들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만, 그 아이를 숨길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아이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아이를 안아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 아이를 당신 성격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그 아이를 보호하고 지지해 주어라. 당신이 전혀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을 해주어라. 아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고,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해주어라.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라

독이 되는 부모의 행동은 외형이 바뀌어도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며 대를 이어 지속될 수 있다. 세대별로 외형이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고난과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다.

악순환의 고리끊기는 희생자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을 학대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고, 무능한 부모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더 이상 절망적인 상태로 배우자와 자녀들, 친구, 동료, 권위자, 그리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로 살아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하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당신부터 변화를 시도해야 좀 더 큰 반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음으로서 어린 시절에 덧칠된 잘못된 믿음과 규칙들로부터 자녀를 보호해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부숴버릴 엄두도 낼 수가 없다.

독이 되는 부모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독이 되는 부모들로 하여금 상처를 입힌 자녀들에게 사게 해야 한다. 당신부터 자녀들에게 사과하라. 사과라는 게 그저 안아주면 되는 거라든가,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징표라거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당신을 존경할 것이다.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사과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진심 어린 사과는 가장 치료 호과가 높다.

자녀에게 사과할 때는 아이들이 자신의 느낌과 지각을 믿도록 가르쳐야 한다. 당신이 실수를 했더라도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잘못을 책임지는 모습도 반드시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당신 자녀도 실수는 누구든 할 수 있고, 실수를 하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사과를 함으로써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자녀의 인생을 바꿀 힘이 있다. 당신이 죄책감, 분노, 자기 학대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 당신의 자녀도 자유로워 진다. 당신이 집안 내력을 끊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자녀에게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선물할 수 있고, 그 아이는 자기 아이에게 바람직한 선물을 줄 수 있다.

“서른여덟 살의 성공한 정형외과 전문의 고든은 아내가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리자 나를 찾아왔다. 아내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툭하면 화를 내고, 혹독하게 비난을 해대는 남편에게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다.”

고든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저를 때린 건 맞습니다. 잘되라고 때린 거지요. 그런데 그게 제 결혼 생활까지 망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가 고든의 인생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에 나오는 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를 의심해보라. 어릴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나 가치를 상실한 사람은 살면서 여러 가지 고통의 스펙트럼을 보인다. 부모들은 가끔 실수는 하지만, 대개는 이해와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본다. 하지만 가끔 아이의 삶을 좌지우지하려고 들면서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군림하려는 부모들이 있다.

이런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해를 끼친다.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는 유독성 화학물질과 같이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침투해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 고통을 주고, 그 아이가 부모가 되면 자신의 아이에게 다시 상처를 입힌다. 특히 신체적인 학대는 너무나 큰 상처가 된다. 저자가 독이 되는 부모를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건강하지 못한 가정, 병든 가정이 대를 이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부터 그 고리를 끊어 스스로 고통에서 놓여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떤 부모가 독이 되는 부모일까? 잔인한 말로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부모가 있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네가 뭘 하겠니, 믿었던 내가 바보야 등.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도 있다. 인격적 존재로서 자식을 인정하지 않고 신처럼 군림하는 부모도 있다. 보호와 보살핌이라는 부모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능한 부모도 있다. 자식을 조종하는 부모도 있고,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성적으로 학대하는 부모도 있다. 아무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연약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아이를 병들게 한다. 이런 가정은 병든 가족이다. 병든 가족은 자식에게 끝없는 고통을 주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독이 되는 부모에 의해 양육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그들-독이 되는 부모를 용서하지 말라고 한다. 독이 되는 가정에서 자란 것은 당신의 책임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당신에게 고통을 준 부모에게 직접 분노를 표현하라고 권한다.

성폭행을 당한 자녀에게도 절대 네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애도할 것을 권한다. 가까운 이들을 잃었을 때 애도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부모의 질곡에서 놓여나기 위해서도 애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고통을 준 부모와 대면하기를 권한다. 대면하여 부모가 자신에게 준 고통에 대해 솔직히 말한다 . 부모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 때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털어놓는다. 만약 부모가 돌아가셔서 대면이 어렵다면 편지를 써서 무덤 앞에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부모가 준 고통을 대면한 다음 그것으로부터 놓여나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잔인한 말과 학대, 폭행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라는 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들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고통의 순환이 끝난다는 것이다. 저자 수잔 포워드는 미국의 심리치료 전문의로 심리치료 및 상담 활동을 하고 있으며, ‘흔들리는 부모들’ ‘그들은 협박이라 말하지 않는다’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