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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

택리지요약(원본자료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음)

사민총론(四民總論)과 택지(擇地)

백성을 사(士), 농(農), 공(工), 상(商)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사(士)는 사대부(士大夫)로서 사회의 지배계층에 해당하고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직분과 지위에 적합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땅히 살 만한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이 이중환의 입장이다.

팔도총론(八道總論)

팔도의 위치: 조선의 땅은 팔도(八道)로 나뉘어 있는데 함경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그것이다. 각도의 지리적 위치는 함경도는 여진과 이웃하고 있고, 강원도는 함경도의 남쪽에 계속된다. 평안도는 중국의 심양에 인접하고(淸의 고도 원래의 봉천), 황해도는 ;평안도의 남쪽에 계속하고, 경기도는 강원도·황해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경기도 남쪽은 충청도와 전라도가 위치하고 있으며, 전라도의 동쪽이 경상도이다. 경상도는 옛날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땅이다. 함경도·평안도·황해도는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땅이었다.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濊貊)의 땅이었다.

조선의 지세: 동남서가 바다요, 다만 북쪽 대가 여진·요심에 통하는데 산악이 많고 평야가 작다. 그 백성은 유순하고 근직하나 기량이 작다. 조선의 남북으로의 길이는 삼천리에 걸쳐있으나 동서로는 천리가 채 못 된다. 대외적으로 조선은 대체로 중국과 왜의 사이에 위치한다. 조선이 성립되기 이전의 지리와 관련한 역사: 고조선이 존재하다가 위만이 남하하면서 지배세력은 익산으로 세력을 옮기고 마한이라 하였다. 마한의 국경은 역사에 분명하지 않으나 진한·변한과 함께 삼한이라 한다. 혁거세는 한나라의 선제때 일어나 지금의 경상도를 모두 차지하고 진한·변한을 복속시키었으며 신라라 하였다. 경주를 서울로 정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주몽은 말갈에서 일어나 평양을 점거하고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그리고 주몽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 남하하여 부여를 서울로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백제는 지금의 전라도에 지역에 해당된다. 삼국이 성립하고 발전하다가 신라가 모든 세력을 누르고 국토를 차지하였다. 이후에 후삼국으로 분열되었으나 태조왕이 당대를 평정하고 고려를 세웠다.

평안도: 평안도는 압록강(鴨綠江)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이후로 압록강의 이남을 경계로 삼았다. 평안도는 넓은 평야와 아름다운 산의 경치를 가지고 있다. 대동강 유역의 땅은 오곡과 면화의 재배에 적당하나, 둑과 시내가 적어서 오로지 밭곡식을 일삼는다. 하류에는 벽지도가 있어서 원주민들이 여기에 논을 만들어 일무(一畝)에 팔(八)석을 거둘만하였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서남쪽에서 시작하여 삼백 리에 이른다. 평양의 서쪽으로 백리에는 청천강이 흐르고, 과거 고구려 시기 수나라의 군사들이 얕은 개울로 알고 이르다 많은 수가 수몰하였다. 안주의 동쪽에는 영변부가 있는데 지형이 험준하여 철옹(鐵瓮)이라 부른다. 강계부는 수목이 우거지고 매년 춘추에 백성들이 채취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여기에서는 인삼이 많이 나서 삼산지(蔘産地)라 부르게 되었다. 의주는 국경의 중요한 지역으로 압록강과 닿아있다. 압록강에는 위화도라는 하중도가 있는데 태조가 여기서 회군하여 최영을 몰아내고 고려의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아서 조선을 건립하였다. 대체로 청천강이남을 청남이라 하는데 동서로 지형이 좁다. 평지가 적고 논이 없으며 거의가 밭으로 일궈져 있다. 청북은 지형이 높고 추우며 북방과 맞닿아 과실의 수확이 없고, 백성은 게으르고 구차히 산다. 오직 평양과 안주만이 큰 도회를 이루고 중국과의 거래가 많은 관계로 물자가 넉넉하다. 청남은 내지에 가깝고 풍속이 문학을 숭상하나, 청북은 풍속이 미개하고 무(武)를 숭상하지만 오직 정주(定州)에만 등과한 문사가 많다.

함경도: 평안도의 동쪽을 백두산의 대맥이 남하하면서 하늘을 가르는 것 같이 높은 영(嶺)이 되었다. 이 영의 동쪽이 바로 함경도이다. 옛날 옥저의 땅으로, 남쪽은 철령(鐵嶺)이 한계가 되고 동북쪽은 두만강(豆滿江)이 한계가 된다. 본도의 남북의 길이는 이천리가 넘고 바다와 가깝고 동서로는 불과 백리다. 주몽의 점거지가 되었다가 여진인들이 살았으나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여진인을 몰아내고 강의 이북으로 육백리에 있는 선춘령을 경계로 삼게되었다. 이후 육진(六鎭)에 병영을 두어 백두산의 동남에 있던 여진의 근거지를 모두 우리의 판도에 두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강희제는 목극등으로 하여금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나누게 하였다.(백두산 정계비-토문강의 위치가 분쟁의 여지로 작용하게 된다.) 함흥이북으로는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굳세고 사납고 토지가 차고 메말라 곡식이라고는 오직 조와 보리 뿐 이고 메벼가 적고 면화가 전혀 없다. 원주민들의 성질이 마치 여진인과 같아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어 추위를 견딘다. 산에서 얻어지는 담비와 인삼으로 상인과의 교역으로 옷감을 얻는다. 바닷가의 생산은 풍족하나 황해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함흥읍은 문학을 숭상하고 등과를 하는 자도 있었다. 또 평야가 먼 데까지 펼쳐져 있으나 바다에 인접하여 거칠고 평양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함흥에는 태조가 살던 집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아들 태종이 사자를 보내어 모시어 오려 했으나 태조의 심지를 수이(易)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사자 박순(朴淳)의 죽음으로 태조가 마음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안변과의 서북경계로 원산이 있는데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다한다. 동북은 해로로 육진에 통하며 육진 및 여러 읍에는 상선이 모여들어 도회를 이룬다. 조정에서는 여기에 곡식창고를 짓고 흉년이 되면 풀어서 백성을 구제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은 조선건립이후 삼백 년 간 관리의 배출이 극히 드물었다. 대각에 오르는 이가 있다 하여도 극소수였다. 태조가 왕씨의 왕위를 대신하였던 만큼 그 좌명 공신도 또한 서북도의 맹장이 많았다. 이미 나라를 얻은 다음에는 "서북인은 크게 쓰지 말라" 하였다. 이곳의 풍토가 척박하고 성질이 드세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아니한 관계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황해도: 황해도는 경기도와 평안도의 사이에 위치한다. 백두산의 남맥이 함흥부의 서북에 이르러 검문령(檢門嶺)이 되고, 다시 남하하여 노인치(老人峙)가 된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여 삼방치(三方峙)를 지나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일어 철령이 되고, 다른 하나는 서남행 하여 곡산을 지나 학령(鶴嶺)이 된다. 여기서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송악이 되고 이는 고려의 서울이 된다. 두 번째는 면악인데 이는 단군의 옛 서울이다. 셋 째는 곡산과 수안을 지나 자비령(慈悲嶺)과 절령( 嶺)이 되고 서쪽으로 황주 극성에서 그친다. 황주는 절령의 북쪽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경계를 이루게 된다. 수안·곡산·신계·토산 등은 산속에 위치하여 주민이 불순하고 도적이 많이 출몰한다. 평산과 금천에는 등과한 이가 제법 된다. 서쪽 면악의 동록에는 화천동(花川洞)이 있다. 화천동은 청인(淸人)의 조묘지(祖墓地)라 한다. 여기는 평야가 널리 퍼져 있고 토지가 부유해 번창한 촌락이 많고 사대부도 나왔다. 극성의 평야는 동서로 넓이가 십여리이고 서쪽은 남오리강(南五里江) 하류에서 그친다. 강의 동서로 있는 촌락들은 토지가 대단히 비옥해서 오곡과 목화에 적당하다. 그리고 연철(鉛鐵)이 생산된다. 장산곶은 솔밭(松田)을 만들어 비상시의 궁전의 건축·배·수레 등의 제조에 이용되도록 준비하였다. 장산곶 북쪽 금사사(金沙寺)의 바닷가는 모래의 빛이 고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복어·해삼·성게가 나지만 토지는 메마르다. 다만 풍천과 은율은 비옥하여 수확량이 대단하다. 해주는 이율곡이 사당을 지어 학문을 강의하여 이 지역의 학문이 발달하지만 후에는 당파가 조직되어 악향(惡鄕)이라 불리며 주목된다. 해주의 동으로는 평야가 있고 경치가 빼어나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 있어서 납·철·면화·생선·소금의 이익이 있어 일부 부유한 사람이 많으나 사대부는 적다. 황해도는 옥야와 아름다운 평야가 있으나 천하의 다툼을 유발할 수 있는 요충의 땅이 될 터이니 이것이 본도의 단점이라 하겠다.

강원도: 강원도는 함경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고 서북은 황해도와 이웃하고 서남은 경기· 충청의 두 도와 인접한다. 영동에는 과거 예국의 서울인 강릉과 삼척, 울진이 있다. 본도의 남북의 길이는 천리에 이르나 동서로는 백리에 미치지 못한다. 척량산맥으로 이미 서북을 막고 동남은 멀리 바다와 통한다. 지세는 옹색하고 큰산 아래에 위치하나 산과 평야가 모두 낮고 평평하고 아름답다. 동해는 조수가 없고 맑아서 벽해(碧海)라고 부른다. 동해는 이름난 호수와 바위가 많아 경물이 전국에서 첫째이다. 관동팔경이라 부르는 여덟 가지 경치가 아름답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는 기승지가 많고 골짜기 등에는 그윽하고 물이 맑다. 사람들은 경치를 거닐고 유희를 즐겨 학문을 하는 이가 적다. 하지만 강릉에서는 급제자가 많다. 농업은 수확이 부족하다. 삼척이 유일하게 생산이 뛰어나다. 토지가 메마르지만 어업과 전업으로 부자가 많다. 촌민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한다. 영월에는 사육신의 묘지가 모셔져있다. 회양에서 정선사이의 강은 서로 흘러 한강으로 이른다. 산의 경치는 좋으나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다. 춘천은 인계의 서쪽에 위치하며 한양까지는 서남으로 이백리다. 과거 맥국의 서울로 소양강을 끼고 있다. 원주는 영월의 서쪽에 있으며 산골짜기의 고원분지가 열려있어서 맑고 깨끗하며 험준하지가 않다. 또 영동과 서울의 사이에 있어 동해의 어염과 인삼, 관락, 궁전의 재목을 운수하여 도회가 되었다. 북쪽의 횡성은 산골짜기가 있어 산이 평평하고 물이 맑다. 충주강의 하류는 오대산의 서쪽에서 적악산맥이 끊기고 강 외의 산이 막혀있어 자리가 좋다. 이는 서울로 통하고 주상으로 부자가 많고 사대부가 많은 곳이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예맥의 땅을 본거지로 일어나고 왕을 자처하였으나 잔학하여 후에 태조에게 쫒겨나게 되었다. 근래는 개간과 화전(火田)으로 숲이 줄고 인삼의 소출이 줄어들게 되었다. 홍수가 나면 토사가 유실되어 한강의 수심을 얕게 한다.

경상도: 경상도는 지리가 가장 좋다. 강원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서로는 충청·전라와 인접한다. 북으로는 태백산이 있어 풍수가들은 하늘에 솟은 수성(水星)의 형국이라 한다. 좌측에서 시작한 지맥은 동래에서 그치고 우측에서 시작한 지맥은 소백·작성·주흘·회양·청화·속리·황악·덕유·지리산 등이 되어 남해에서 그친다. (좌우는 서울에서 바라보는 입장이므로 지도상의 동서와는 반대이다.) 두 지맥의 사이는 비옥한 편이다.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에서 시작하고 강은 김해로 흘러가 경상도의 중앙을 지난다. 강을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로 나뉜다. 이 땅은 과거 신라의 땅으로 소위 계림군자국(鷄林君子國)이다. 지금은 동경을 두어서 다스린다. 신라는 태조에게 땅을 바치고 귀속 되었다. 신라시기에는 당과의 교류가 깊었다. 초기의 경상도에서 등과가 많이 이뤄져서 과거 정치의 판도를 잡았다. 선조 이후로는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이가 적었다. 하지만 풍속이 훌륭하여 문과의 급제율이 전국에서 으뜸이다. 좌도의 땅은 메마른 탓에 검소하지만 학문에 정진하는 풍조가 이뤄져 있고 우도는 비옥하여 호사스럽지만 좌도에 비하여 학문열이 떨어진다. 본도의 사람들은 학문을 중시하고 서로의 의리를 중시한다. 시골의 한적한 곳에서도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동래에는 왜인과의 거래가 이뤄지고 남해안 지역에는 왜의 도주가 머물며 조곡을 바꾸어 가기도 하였다. 경상우도는 조령의 아래에 있다. 이는 한양으로 이르는 관문이다. 덕유산부근의 토지는 비옥하고 특히 진주는 유능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전라도: 동으로는 경상도 북으로는 충청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백제의 땅으로 후삼국시기 견훤은 태조를 여러 번 공격하여 위태롭게 하였다. 고려가 견씨를 평정하고 난 후에 백제인을 미워한 나머지 "차령(車嶺)이남인을 채용치 말라"고 하였다. 전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서남지방은 어염·메벼·실과·솜·모시와 닥·대나무·귤·유자와 감의 이익이 있다. 전라도의 풍속은 풍요로우나 학문을 하는 자가 적다. 덕유산은 충청·전라·경상도의 교차를 이루고 있다. 이 중 마이산의 한 지맥은 서남으로 달려 임실과 전주의 경계를 따라 하나는 서향하여 모악이 되어 만경·동진강에서 그친다. 다른 하나는 서남향하여 순창의 덕흥산이 되고 정읍의 노령이 되는데 이는 남북 통행의 대로이다. 노령에서 갈라지는 산맥은 서로는 영광에서 그치고 북으로는 부안 변산에서 그치고 동남으로는 담양 광주하의 여러 산이 된다. 전주는 인구가 조밀하고 재화가 쌓여 서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전도에서 오직 전주만 맑고 조촐하며 가장 살 만하다. 예산은 충청과의 경계에 있고 좋지 않은 땅이다. 이에 반하여 강경·황산은 배가 머무는 곳이다. 탄현의 동은 고산현이고 용화의 남은 익산이다. 고산과 익산은 토지가 비옥해도 산세가 험해 살 곳이 못 된다. 모악의 서쪽 옥구·만경은 사람이 살 곳이 많다. 노령의 서로는 영광·함평·무안이 되고 남으로는 장성과 나주다. 법성포는 아름답고 동네가 열지어 있어서 소서호(少西湖)라 한다. 바다에 접한 여러 읍에는 조창을 두어 조운을 한다. 나주는 한양과 비슷하고 인물이 많다. 목포는 풍기가 화창하고 땅이 넓고 물자가 넉넉하여 광주와 함께 명읍이라 부른다. 전라도의 해안의 수심은 육지에서 토사의 유입으로 점차 낮아지고 있다. 영암은 중국과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부흥산의 동으로는 임실, 순창, 남원과 구례가 있어 모두 산악이 있는 군이다. 섬진강은 전라와 경상의 경계로 남원의 절경을 이룬다. 남원과 구례는 논이 많고 경치가 좋다. 임실에서 구례에 이르는 강변은 경치가 좋고 촌락이 많다. 구례는 지리산의 서쪽에 있어 과거에는 악토(惡土)라 했는데 근자에는 많이 맑아졌다. 광주는 나주에 통하며 풍기가 넓고 이름난 촌이다. 해남 강진은 탐라와 연결하는 곳으로 이익이 많다. 그러나 겨울에도 벌레가 동면하지 아니하고 장기가 서리고 일본에 가까워 살 곳이 못된다. 남해는 물살이 세고 급하여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10만의 왜군을 물리친 곳이라 한다.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있고 지방 산물이 넉넉하다. 흉년이 적고 수확이 많다. 그러나 본도는 멀리 떨어져있고 풍속이 다르므로 살 곳이 못된다.

충청도: 경기도와 전라도의 사이에 있어서 서는 바다에 임하고 동은 경상도와 인접하고 동북은 강원의 충주와 인접한다. 본도의 반은 차령(車嶺)이남에 있고 반은 위에 있어 경기와 이웃한다. 산물은 전라도, 경상도에 미치지 못하나 사대부가 많고 여기에 기반을 두고 근거하여 사는 사람이 많다. 서울과도 가까워 살기 적당하다. 충청은 내포를 가장 좋은 곳으로 삼는데 가야산 둘레의 십현을 통칭하는 것이다. 본토의 바다와 가까운 곳은 학질과 부스럼병이 많다. 산천이 평평하고 잘 짜여 있으나 뛰어난 맛이 적고, 구릉과 마른 땅과 젖은 땅이 아름답기는 하나 대자연의 기이한 경치가 드물다. 오직 보령이 산수가 좋다. 결성, 해미, 안면도는 큰 만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가야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태안, 서산이 있고 강화와는 하나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다. 서산의 동쪽은 은천, 당진이고 다시 큰 만을 사이에 두고 아산과 서로 대치한다. 북의 사면은 경기도의 남양과 화량과 사이에 작은 바다를 두고 마주본다. 여기서 뱃길로 왕래하면 한양과도 가깝다. 충청의 서쪽은 어염의 생산으로 이익이 크다. 성주산의 남으로는 서천, 한산, 임천인데 모시의 재배가 적당하고 그 이익이 전국에서 으뜸이며, 강과 바다의 사이에 적당하여 뱃길이 편하다. 정산, 정양은 토지가 장천이라 살 곳이 되지 못한다. 공주는 금강의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경계가 넓다. 금강은 공주의 북에서 다시 남하하여 다시 서로 기울어 바다로 흘러간다. 금강의 하류에는 평야가 있고 강의 내부까지 배가 드나들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강경지방은 우물대신에 빗물을 받아서 침전시켜 음용한다. 부여는 백제의 서울이고 산야가 평탄하고 논이 기름져서 살 만한 곳이며 공주의 서북은 석간수(石間水)가 많고 논이 기름지고 목화, 수수, 조를 갈기에 적당하고 사대부가 살기에 좋다. 공주의 유구는 어염의 이익을 독점한다. 추풍령은 평평하고 암석이 윤택하고 시내가 맑으며 토지고 비옥하고 관개도 쉬워 한(旱)재가 적다. 청산도 그러하다. 금산은 관개가 쉽고 경장지가 비옥하다. 괴산·청주·문경의 교차점에는 재목이 많고 거래가 이뤄진다. 북쪽의 진천은 청주에 비하여 평야가 적고 산이 많다. 그러나 큰 내가 있고 비옥하다. 안성과 직산은 바다와 가까워 이익을 얻는다. 청안은 산수가 촌스러워 살 곳이 못된다. 천안, 직산, 평택, 아산, 신창, 온양, 예산의 풍속은 서로 같다. 하지만 남쪽은 산골에 가까우며 토지가 기름지고 목화에 적당하고 북은 바다와 가까우며 토지의 메마름과 기름짐이 반반이다. 어염의 이득은 있으나 목화는 적당하지 않다. 서해안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하였고 여기서 거래가 이뤄지고 부자가 많다. 유궁포의 여러 읍중 예산만이 도회가 되었다. 아산과 온양, 충주는 사대부가 많고, 충주는 수륙으로 한양과 통하여 유사시는 반드시 싸우는 지역이 된다. 임진왜란때 신립이 여기서 패한 적 있다. 금천, 가흥, 말마리를 내창과 함께 충주의 사대촌이라 한다. 충주의 서북에는 탄금대가 있는데 우륵이 가야금을 여기서 탔다고 전해진다. 충주의 동북은 제천으로 지형이 높고 바람이 차고 토지가 척박하여 면화의 재배가 없고 부자가 적다. 북으로는 의림지가 있는데 과거 신라시대에 관개로 쓰였다 한다.

경기도: 죽산과 여주는 충청과 경계한다. 죽산의 칠정산은 기호의 경계를 이루고 서북으로 뻗쳐서 수유현에서 끊어져 평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용인의 부아산이 되고 석성산 광교산이 된다. 광교산의 서북에서 관악이 되고 서쪽에서 수리산이 되어 서해로 들어 간다. 영주 영릉은 왕의 묘지가 있다. 중산 서쪽의 한남 여러 읍은 촌락이 쇠퇴하고 산수가 화장해 살 곳이 못된다. 수로는 충주에서 강을 따라 원주 양근을 돌아 광주 북쪽에 이르러 용진강을 만나 한양 앞의 강이 된다. 여주는 강남에서 첫째의 땅이다. 강남 기슭의 마암은 검룡소가 있다. 북쪽의 지평, 양근은 골짜기가 깊어 조광조가 복거하려던 곳이다. 광주는 유사시에 전장터가 되므로 살 곳이 되지 아니한다. 경기도의 서로는 인천, 부평, 김포가 있고 더욱 서로는 강화부가 있다. 강화부를 건너는 바다에는 손돌목이 있어 건너는 배가 조심하지 않으면 곧잘 부서진다. 강화부는 배를 대기가 수월치 않고 자연적으로 요새의 지형이라 외침을 받아도 강화까지 미치지 아니한다. 하지만 결국 몽골의 용골대가 강화부를 건너와서 패배시키었다. 수원의 동쪽은 양성, 안성인데 화물이 풍부해 도회를 이루고 수원의 북쪽은 과천이고 과천위로 십여리를 가면 서울의 남문(南門)이다. 백악은 형가(지형의 형국을 잡는 풍수가)에 말에 "충천(衝天)하는 목성(木星)의 형상이 궁성의 주산이 된다." 하였다. 신라의 중 도선은 "왕을 이을 자는 이씨이고, 한양에 도읍 할 것이다." 하였다. 고려의 후기에는 무학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였다. 서울의 외성은 눈이 내려 녹은 안쪽과 그렇지 않은 밖을 구분하여 경계를 삼았다. 서울 주위의 양주, 곤천, 가평, 영평은 동교가 되고 고양, 적성, 파주, 교하는 서교가 된다. 두 지방 모두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한양의 정면전면이 큰 강으로 막히고 오직 서쪽만이 황해도로 통한다. 도성에서 서로 오리만 가면 사현이 되고 사현고개 넘으면 녹번현인데 여기는 "한 사람이 관문을 맡으면 만 사람도 열지 못한다" 하였다. 본도의 북으로는 연천이 위치하고 마전의 북쪽에 사녕이 있다. 연천은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 만한 곳이 적다. 삭녕은 토지가 자못 좋고 강에 임하여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

복거총론(卜居總論)

대저 살 곳을 택할 때에는 처음에 지리를 살피고 다음에 생리, 인심, 산수를 돌아본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한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곳은 못된다. 지리가 아름답고 생리가 아름답지 못하면 오래 살 곳이 못되며 생리가 좋고 지리가 좋지 못하여도 역시 오래 살 곳이 되지 못한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좋아도 인심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이고,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맑은 정서를 기를 수가 없다.

지리(地理)

지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말하는가? 첫째 수구를 보고 다음에 야세·산형·토색·수리·조산·조수 등을 본다. 수구가 이지러지고 성글고 텅 비고 넓은 곳은 망하게 된다. 수구는 반드시 잠기고 거슬러된 사격이라 한다. 물이 힘차게 거슬러 흐르는 물이 판국을 막아으면 길하다. 게다가 겹으로 싸이면 더욱 길하다. 야세는 들이 매우 넓으면 터는 굉장히 좋은 곳이다. 피할 곳은 사방의 산이 높아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좁고 작은 산에 사는 것보다는 넓은 들에 사는 것이 낫다. 산형은 주산이 수려, 단정하고 청명하고 연약·아담하면 제일인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사방의 산이 멀리 있어 들이 널찍하고 산맥이 평지로 뻗어 내려 강을 만나 들 터를 이룬 곳이면 그 다음이 된다. 산맥은 나약하나 생기가 없고 산 모양이 무너지고 기울어진 곳은 길기가 적다. 토색은 흙과 모래가 굳고 조밀하면 우물이나 샘이 맑고 차다. 이런 곳은 살만 하다. 흙빛이 붉은 진흙, 검은 사력, 황토 등이면 죽은 흙이며 그런 땅 에서 솟는 물은 반드시 산장기가 낀다. 조산은 , 추악한 돌로 이뤄진 봉우리 무너지고 떨어져나간 산세, 넘어다보는 산형, 괴이한 돌·바위가 산의 아래, 위에서 보이는 곳과 긴 골짜기의 높은 사가 좌우 전후에서 보이면 살 곳이 못된다. 조수는 대개 큰강이 거슬러 드는 곳은 집터나 음택 모구 초기에는 흥하나 후에 반드시 패망하는 자리다. 오는 물은 반드시 산맥의 방향과 그 음양의 두 기운이 합치면서 구불하게 유유히 흘러드는 것이 좋고 활을 쏜 것처럼 흘러들면 좋지 않다. 이상의 여섯 가지 수구·야세·산형·토색·수리·조산, 조수는 즉 그 요지다.

생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부득이 재리를 경영하며 살림을 넓히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소득재화를 구하여 힘입게 된다. 재화는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땅에서 생기므로 땅이 비옥한 것이 제일이다. 다음으로 배와 수레와 사람이 모여 서로 통하는 곳이라야 한다. 우리나라의 최고 비옥한 곳은 전라도의 남원과 구례, 경상도의 성주, 진주 등이다 경상좌도는 메말라 가난하고 우도는 기름지다. 전라도는 지리산의 곁에 자리잡은 곳은 기름지다. 해안에 가까운 곳은 고을에 물이 없어서 가뭄이 많다. 충청도는 내포평야와 차령의 이남은 기름지고 메마른 땅이 반반이다. 한강의 북쪽은 메마르고 강원도에서 서쪽의 개성부까지 역시 메마르다. 강원도 영동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곳도 메마르고 황해도는 메마르고 기름진 곳이 반반이다. 평안도의 산속 고을은 메마르고 바다 주변의 땅은 비옥하다. 목화는 영남·호남이 잘 되는데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평안도의 들에서도 잘 된다. 그리고 진안, 연전, 강전, 임천, 한산, 안동, 예안에서 고루 재배된다. 물자의 운반에 있어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 불편하여 온 나라의 상고들은 거개가 말등에 화물을 싣고 다닌다. 이런 까닭에 운송비가 많이 들어 이득이 적다. 이는 배에 싣고 운반하느니 못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지라 뱃길은 전국의 각지에 있고 모두 한양으로 통한다. 김해의 칠성포에서 상주까지 배가 드나든다. 서쪽으로는 진주까지 거슬러 갈 수 있다. 전라도 나주의 영산강 영광의 법성포 충주의 사진포 전주의 사탄 등지도 조수와 통하므로 상선이 드나든다. 은진의 강경은 상선이 모이는 곳이라 큰 도회를 이룬다. 한강은 용산까지 배가 드나들게되었다. 많은 배가 여기에 정박하게 되었다. 평안도의 평양의 대동강과 안주의 청천강이 배를 통하여 이(利)를 본다. 삼남지방은 조창을 두어서 조운으로 수송하는 까닭에 수로에 조군(漕軍)을 두어 일년 내내 줄지어 수송한다. 평안도 함경도는 조운으로 납이 이뤄지지 않는 까닭에 수운이 없고 다만 평안도의 상선이 서울의 한강에 통래한다. 남한강은 배가 서로 통하여 상선이 수시로 이동하고 거래가 이뤄진다. 부유한 상인이 되면 일본과 중국의 연경과 통한다. 이러한 자는 한양에 많고 다음으로 개성이며 다음으로 평양과 안주가 많다.

인심: 공자는 "마을의 풍속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 하였고 맹모(孟母)의 삼천지교는 좋은 풍속을 좇은 것이다. 우리나라 팔도가운데 평안도 인심은 순후하여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한 경상도의 풍속이다. 함경도는 오랑캐와 접경하여 백성이 모두 굳세고 사납고 모질고, 강원도는 산골백성으로 몹시 불손하고 전라도는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여 그른 일에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의 야읍은 백성이 재물이 시들어 쇠하였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財利)에만 따른다. 이것이 팔도 인심의 대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민의 풍속이고 사대부의 풍속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후로 이중환은 붕당의 폐단을 언급하면서 인심이 흉흉해짐을 통탄한다. 나라의 인심이 사라지면 흉흉하고 더 이상 사람이 살아가는데 낙이 없어진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의 인심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산과 강(山水): 산수총론(山水總論), 어떻게 산수를 말할 것인가? 백두산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고 두만강과 압록강의 안쪽이 우리나라다. 백두산에서 산맥이 한 복판으로 내려온다. 동쪽가지는 두만강으로 뻗고 서쪽의 가지는 압록강으로 뻗는다. 동쪽의 가지는 백리가 되지 못하나 서쪽은 산협이 끊이지 않고 내려와 남쪽 줄기로 약 천리를 내려가서 경상도의 태백산에 이르기까지 한줄기를 이룬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수(水)형이다. 강원도와 함경도의 사이에 철령을 두고 있다. 영(嶺)이라 함은 고개로 조금 낮고 평평한 곳을 말한다. 평안도 일도는 모두 함흥에서 뻗은 서북지역을 만들었다. 강원도 일도는 모두 영서에서 뻗어 내린 것으로 전국서 가장 짧다. 태백산맥은 좌우로 갈라져 좌편은 동해를 따라 남하하고 우편은 소백산의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좌우는 동서와 반대가 된다)소백의 덕유산은 노령에서 갈라져 서쪽가지는 흩어져 남해의 여러 섬을 이룬다. 이중 가장 긴 것은 광양 백운산으로 남으로 달려 여러 섬이 된다. 전국의 수계는 등마루의 바깥쪽까지 모두동해로 흐르고 경상도 일도 및 섬진강은 남으로 흐른다. 북쪽의 의주에서 남쪽의 나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산(山): 이중환은 전라도와 평안도는 가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산에 대해 설명한다. 금강산은 모두 돌로 이뤄졌는데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다. 금강산은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명산이다. 설악산도 돌로 이뤄진 산인데 높고 험하고 낭떠러지를 이루며 그윽하고 깊고 싸늘하다. 오대산은 흙산으로 바위와 골짜기가 겹겹이 싸고 깊숙이 막혀있다. 태백·소백산도 흙산이나 그 흙빛이 수려하다. 두산 모두 동부의 낮고 평평한 곳에 있고 산허리의 위는 돌이 없는 까닭으로 비록 웅대하나 살기(殺氣)가 적다. 백두산에서 태백산에 이르기까지는 대체로 한줄기산맥으로 통한다. 속리산은 석세가 높고 크고 연꽃의 형상이다. 이곳의 물맛은 차고 맑고 물빛도 검푸르러 가히 사랑할 만하다. 석유산은 꼭대기가 평평하다. 덕유산은 흙산이다. 여기는 구천동이 있고 물이 맑고 그윽하다. 또 성을 쌓고 여기에 사기와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지리산은 남해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다. 그래서 두류산이라 하기도 한다. 산의 기운이 영험하고 지지(地誌)에는 태을성신(太乙星神)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온난하여 산 속에 밤, 대나무, 감이 절로 열고, 절로 진다 하였다. 청학동과 만수동이 있다고 전해진다. 경상일도는 석화성(石火性)이 없다 하였다. 해인사는 가야산에 위치하는데 팔만대장경판을 소유하고 있다. 안동의 척량산은 태백산맥이 내려오다가 예안강에서 멎은 것이다. 돌벽이 있으며 높고 기이한 모양이라 한다. 태백산과 소백산의 사이에는 부석사가 있는데 신라 때의 의상이 지팡이를 꽂은 터가 있다한다. 이후로는 유명한 절의 이름을 들고 있다.

산형(山形): 무릇 산의 형체는 반드시 수려한 돌로 산봉우리를 이루어야 산도 수려해 보이고 물도 맑다. 반드시 강과 바다가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야 큰 힘이 있다. 이런 곳은 네 곳이 있는데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진잠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이 그것이다. 오관산은 도선이 수모본간(水母本幹)이라 하였고 산세가 극히 멀고 길다. 감여가들이 말하기를 주천토이다. 기세는 웅장하고 넓고 크며 의사는 크고 원만함을 포용한다. 오관산의 좌우로는 골짜기에 마을이 많다. 서쪽으로는 박연폭포, 동쪽으로는 화담이 있어 샘과 폭포가 아름답다. 한양의 삼각산은 도봉산과 잇댄 산세를 이룬다. 형세가 수많은 불꽃이 하늘로 치받는 것과 같다. 산은 보필이 없고 골짜기의 동네도 적다. 미더운 것이라면 남산의 한줄기가 거슬러서 판국(版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여가들은 정남의 방향이 좋지 못하다 한다. 계룡산은 웅장하기가 오관산에 못 미치고 수려함도 삼각산에 미치지 아니하다. 평지가 적고 동남이 또한 트이지 못하였다. 구월산은 산맥이 되돌아 원맥을 돌아다보는 지형이다. 서북은 바다에 면하였고 동남에서는 두 강물을 거슬러 받는다. 이외에는 춘천의 청평산이 있는데 경치가 아름답고 영험하다. 해미의 가야산은 흙산이고 가야사의 골짜기는 상고(上古)상왕(象王)의 궁궐터이다. 비록 합천의 가야산만 못하나 해상의 경치가 아름답다. 남포의 성주산은 두산이 합해 큰 동네를 만든다. 이는 시내와 골짜기 동네사이에 또한 살만하다. 노령의 한가지는 북에서 부안에 이르러 서해의 가운데로 들어간다. 서남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이것이 변산이 된다. 사람이 살수는 없으나 명승지라 할 만한 곳으로는 백운산이 있다. 영암의 월출산도 그러한데 돌 끝이 뾰족하다. 광주의 백운산은 도선이 도를 닦던 곳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순천의 조계산은 남쪽의 송광, 계동의 승지가 있다. 청송의 주방산은 모두 돌로 이뤄져 기이한 산이다. 이 밖에도 산이 많으나 샘과 돌이 없는 곳은 언급하지 않았다.

해산(海山): 무릇 바다의 산 가운데에는 또한 기이한 곳이 많다. 제주도의 한라산은 영주산이라고도 하는데 산 위에 큰 못이 있다. 과거의 탐라국인데 신라때 복속되었다. 목장이 있어 준마가 생산된다. 완도는 전라도 강진의 바다 가운데 있는데 육지에서 십리 떨어져 있다. 이 섬은 과거 신라의 청해진으로 장보고가 웅거하던 섬이다. 울릉도는 강원도의 삼척부의 바다 가운데 있다. 맑은 날 높은 곳에 올라 보면 구름 같다. 이곳은 옛날의 우산국이다.

산수승지(山水勝地): 산수의 경치가 좋은 곳은 마땅히 강원도의 영동지방이다. 여섯 호수사 절경을 이룬다. 삼일포는 마치 숙녀가 화장한 것같이 아름다워 절경을 이룬다. 경포대의 한 작은 산기슭이 동으로 뻗어서 고개마루가 된다. 호수의 둘레는 이십 여리이고 깊이는 낮아서 작은 배가 다니기 알맞다. 통천의 총석정은 금강산의 산기슭이다. 북쪽 바다의 가운데에는 세로로 갈라진 돌기둥이 있어 마치 목수들이 칼로 다룬 것 과 같다. 함경도의 안변부도 경치가 빼어난데 그중 철령의 한 줄기는 동으로 해상을 달려서 전개되어 높은 일산이나 병풍을 벌린 듯이 아득히 그림과도 같다. 학포라는 큰 호수는 둘레가 삼십 여리이며 물이 깊으나 투명하고 맑다. 영동과 함경도의 경치가 전국에서 아름답다.

사군산수(四郡山水): 영춘·단양·청풍·제천의 네 가지 군은 비록 충청도에 속하나 실은 한강의 상류에 위치하였다. 단양은 전 고을이 모두 여러 산 가운데 위치한다. 십 여리의 평야는 없으나 강과 시내바위의 승지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이담(二潭)과 삼석(三石)이라 부른다. 이중환 충청의 북쪽에 있는 네 군을 유심히 보고 그에 대한 세심한 경치를 나열하고 있다.(네 군의 경치에 관한 언급이므로 간략하게 적었다.)

강거(江居): 대저 높은 산, 급한 물은 한때의 구경거리는 되나 살 곳으로 적당하지 아니하다. 그러나 음산하고 험악한 형상이 전혀 없을 경우 영기(靈氣)가 있어 살만한 곳이다. 강거는 평양외성을 팔도의 최고로 친다. 평양은 기상이 크며 삼색이 수려하고 강은 유유히 흐른다. 산은 낮고 강은 대단히 넓어서 배가 다니고 성안과 성밖에는 공청과 관속 그리고 평민이 산다. 시가는 가옥이 즐비하고 상가가 번화하다. 이곳은 배가 드나들어 장사를 하고 부자가 많다. 이밖에도 우리나라에는 공주, 상주, 나주, 목포, 광양, 진주, 부여 등이 강에 임하고 있다. 이들은 삼남의 중심에 있고 서울과도 통하여 살만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언급하지 않는다.

계거(鷄居): 속담에 "계거는 강거만 못하고 강거는 해거만 못하다" 하였다. 이는 재화를 통하고 어염의 획득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무릇 강에 임하여 집과 정자를 짓는 것은 어지러짐이 많아 흥망이 무성하다. 그러나 바다보다는 강이 강보다는 시내의 근처에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는 난세의 기준으로 일컽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계거지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이다. 도산은 산줄기가 합쳐지는 긴 산골짜기가 형성 되어있다. 산이 그리 높지 아니하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아담하다. 하회는 황강의 물이 휘돌아 흘러 마을 앞에서 머물러 깊어진다. 여기의 정자는 모두 절경을 이룬다. 계고로는 오직 이두곳이 전국에서 첫째이다. 다음으로는 영주서북방에 순흥부치와 죽계가 있다.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고 들은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다. "소백산과 태백산의 두산 아래와 한강의 상류는 참으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다" 라는 말이 있다. 다음은 적등산의 남으로 용담에 주줄천이 있고 금산에 잠원천, 장수에 장계, 무주의 주계가 있다. 이들은 모두 지극히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하다. 다음으로는 화령과 추풍령의 사이에 있는 안평계, 금계, 용화계가 있다. 이 삼계는 기름지고 교환이 잘 이뤄지고 청명한 기상이 있는 곳이다. 또 그 다음은 문경의 벙천인데 경치가 좋다. 또 다음은 속리산 북쪽의 괴산인데 뛰어난 경치와 유사시 피할 곳으로 적당하다. 다음은 원주의 주천은 지극히 좁은 산골짜기이나 제법 들이 열렸다. 산은 그리 높지 안고 물은 몹시 맑고 푸르나 논이 적어서 조로 연명한다. 이외에 충청도에서는 보령의 청라동, 홍주의 광천, 해미의 무릉동, 남포의 화계가 있다. 전라도는 남원의 요천, 흥덕의 장연, 장성의 봉연 이들은 모두 땅이 기름지고 생리가 밝아서 살만하다. 경기도에는 용인의 어비천, 강원도 원주의 안창계일대와 횡성읍, 황해도는 해주의 죽천, 송화의 수회촌이 자못 시내와 산의 경치가 좋고 메마르지 아니하다. 무릇 산수라는 것은 정신을 기쁘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삶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들이 야비하게 된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기름지고 지리가 좋으며 생리도 좋은 곳을 택하여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총론(叢論): 이중환은 기자조선을 강조하면서 언급하는데 기자의 자손이 선우씨가 되었고, 고구려는 고씨가 되었다. 신라는 여러 왕인 박(朴), 석(昔), 김(金)의 성씨가 모두 왕이 되었다. 신라의 말기부터 중국과 통하여 비로소 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가지지 못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 사람들이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이 개국할 때 명분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사대부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인품과 능력을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사대부가 평민이 되기도 하고 평민 중에서 사대부로 되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사대부는 나라에 쓰이지 아니하면 산 속에 사는 것이라고 이중환은 말한다. 이중환의 단일 생각인지 아니면 사대부들의 일부들 혹은 여러 사대부의 생각인지 알 수 없으나 사대부보다 평민으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는 농(農)·공(工)·상(商)의 이로움과 자연과 하나되어 사는 이들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일종의 상대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동서남북 살 곳이 없다하는 이가 있는데 이리하면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으며 사대부와 농(農), 공(工), 상(商)의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택리지는 여기서 끝맺고 책의 말미에는 팔역지발문(八域地跋文)이 있어 책의 성격과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고 정자(正字) 이중환의 업적을 기린다. 조선시기에 이러한 지리지를 집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저자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이상의 택리지는 사대부를 비롯한 사람들의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자연의 조건과 환경적인 요소 그리고 인위적인 요소를 자세하게(일부는 추상적이지만…) 기록하고 있다. 그 조건으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그리고 산수(山水)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세부적인 요소로는 산(山), 물(水),강(江), 바다(海), 시내(川), 사람(人), 산물(産物), 기후(氣候), 지형(地形), 명승지(名勝地), 논밭-들(田沓-野), 사람들의 성격(性格), 교통(交通), 상거래(商去來), 도회(都會), 인물(人物), 정치(政治), 그리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그 바탕으로 책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것들의 종합적으로 설명된 것이 바로 택리지(擇里志)다.

출처: 근곡풍수지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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