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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2015/05/28 16:08] – 문서가 wiki:성씨에서 성씨(으)로 옮겨졌습니다 V_L | 성씨 [2021/04/25 03:14] (현재) – V_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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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姓氏) ====== | ====== 성씨(姓氏)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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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역사===== | ||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 ||
- |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 | * |
- |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 | |
- |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 + | |
====삼국시대==== | ====삼국시대==== | ||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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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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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 |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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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
- |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 | |
- |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 | * |
- | -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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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 ||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
- |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 | |
- |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 | * |
- |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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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의 성은 | 삼국 시대의 성은 | ||
- |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 + | |
- | -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 | * |
- | -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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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있고, | 등이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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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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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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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 ||
====조선시대, | ====조선시대, | ||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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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 ||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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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 ||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으로 기록되었다. |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으로 기록되었다. | ||
- | 그리고 | + | 그리고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 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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