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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광역시 출생)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정권은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민주정의당 당대표 및 대통령 후보자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6·29 선언(六二九宣言)을 1987년 6월 항쟁 직후인 6월 29일 발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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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64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 15일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였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1987년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4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발표 했다. “탁 치니 억”은 한동안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 오연상의 진술을 확보했다. 1월 14일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호를 제일 먼저 목격했던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은 1월 16일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고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경찰은 14일 밤에 은폐를 위하여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했다. 부검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중 하나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였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진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 것도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최환 부장검사 지휘대로 소견서를 받고 실무를 처리한 것이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로 알려져있다.

사실 검찰이 부검을 강행한데는 경찰에 대한 악감정이 한 몫 했다는 주장이 있다. 박종철 사건이 발생하기 6개월 전에 발생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 검찰은 경찰의 요청에 따라 사건을 은폐해야 했다.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봐오던 사람들이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제5공화국 때에는 경찰이 검찰보다 당연하게도 힘이 셌다. 독재정권 핵심부는 일선에서 반독재민주화세력을 때려잡는 경찰을 훨씬 이뻐했고 검찰은 경찰에서 넘어온 사건을 뒤치닥거리하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서 경찰, 검찰을 모두 배후조종하고 있었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안기부(국정원)의 노골적인 정치개입과 검찰통제가 사라지고 경찰도 민생치안위주로 재편되면서 생긴 권력의 공백을 검찰이 치고 들어가면서 검찰권력이 현재처럼 비대해졌다.

아무튼 검찰 입장에서는 성고문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경찰 뜻대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욕은 자기들이 다 먹었다는 분노가 일어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분노가 박종철 사건에서의 부검 강행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 사건의 최초 보도는 중앙일보인데 기자가 취재거리를 찾기 위해 검사실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검사가 "경찰들 큰 일이야"라고 운을 뗐고 사건의 냄새를 직감한 기자가 그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척 검사의 말에 맞장구를 쳐서 대충 내용을 빼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중앙일보는 후속 보도에 소극적이었고 동아일보가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정권은 겨우 5일만에 "지독한 노래"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라는 견해를 뒤집고 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고문 가담 경찰 일부 수감 및 김종호 내무부장관 및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전격 해임하고 고문근절 대책 수립을 하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일선 경찰들의 의욕이 너무 앞서서 벌어진 과잉행동으로 이야기하면서 고문에 가담한 경찰과 지휘계통을 축소발표하였다. 그리고 후임 내무부장관으로 군 출신 강경파로 정권핵심인 정호용을 임명해서 이 사건으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당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 이부영 (훗날 열린우리당 의장)이 사건이 축소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휴지에 적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서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 정말 우연히도 이부영이 수감된 교도소 옆방에 고문경찰관 2명이 들어온 것이다. 이부영의 증언에 따르면 옆방에서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려서 친분이 있는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사실은 고문경찰관이 더 있는데 우리만 잡혀왔다. 자기들만 모두 뒤집어쓰게 됐다.' 라는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시절에는 교도소에 들어온 반독재민주화운동가들한테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대놓고 표현은 못해도 이런 교도관들이 은근히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고. 이부영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사람들을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진실을 알아내서 이부영에게 귀띔하고, 이부영의 서신 작성을 묵인하고, 이를 외부로 은밀히 내보내서 민주화운동세력에 전달한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다가 이들이 모두 정년퇴직한 이후에 공개되었다.

또한 당시 검안의였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오연상 교수는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여 은폐하려는 경찰의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병원 측에 시체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당연히 같은 죽음이라도 고문실에서 사망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중 사망은 뉘앙스 자체가 다르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 교수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 다음날(15일)에도 감시했으나 오교수는 화장실에서 언론사 기자를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다. 소리소문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사건은 한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

하지만 오연상 교수는 이후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그 옆에서는 비명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는데 박종철을 고문하던 수사관들을 조사하는 소리였다고 한다.

오 교수는 "참 이상한 세상이다. 박종철군을 고문해서 죽이고 이번엔 그 수사관들이 고문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근데 1차로 밝혀진 범인(조한경 경위, 강준규 경사)은 사실 축소된 것이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에서는 마치 1차로 밝혀진 범인들이 기껏해야 방조 내지 감독상 책임이 있을 뿐 고문과 직접 관계 없는 무고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있지만 이것은 이부영의 옥중서신이 1차로 밝혀진 범인들의 고백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에 그들도 고문에 적극 가담했음이 밝혀졌다. 강진규 경사의 경우 아버지가 '정말 네가 사람을 죽였느냐, 그렇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다그치자 변명하기 위하여 '사실은 내가 죽이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폭로자 이부영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안상수 검사도 "범인 조작은 없었다. 범인이 더 있다면 몰라도"라고 은근히 암시를 했다고 한다.

경찰 및 안기부 상층부는 이들이 고문치사에 책임을 지고 구속되는 것에 불만을 품자 상관인 박처원 치안감을 통해 5000만 원이 들어있는 예금통장 4개, 즉 2억을 준비해 2개씩 주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2개씩 1억 원을 주고 곧 가석방으로 꺼내주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1억원이면 지금도 큰 돈인데 80년대라면? 이 돈의 출처를 묻자 경찰 동료들이 조금씩 모았다고 했다. 누가 봐도 안기부 자금이었지만 믿을 사람은 없었지만 밝힐 사람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사건의 핵심은 이게 아니다. 그리고 이들을 구속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호송작전이 진행되었는데 위장 간판을 단 2개의 미니버스에 20명의 경관들이 똑같은 점퍼를 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호송됐다. 대공수사관의 얼굴을 북한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둘러댔지만 믿기에는 판타지 같은 사실이었다.

더불어 정권 내 알력이 이것의 은폐를 막았다는 견해도 있다. 10월 유신 이후 최종길 교수 의문사나 장준하 의문사 등 숱한 의문사들이 어둠에 묻혀져 경찰은 고문을 마음대로 자행하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당시 2인자이기는 했으나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후계자 경쟁을 해야 했던 노태우 세력은 내각제를 추진해 주도권을 쥐려 했고 장세동측은 이에 고문사실을 흘려 이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파문이 크게 번지면서 오히려 장세동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대국민적 저항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관련기사 참조.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했고,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의 사법처리를 타진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의 판단은 알아서.

결국 5월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서울지검으로 데려왔고. 공동정범 3명(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이 구속되고 그 뒤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상부 간부 4명(강민창 전 치안본부장(현재의 경찰청장)1),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이 구속된다.

무고한 대학생을 고문해서 죽이고도 모자라, 진실을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일반인조차 분노에 들끓었고, 따라서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2),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 등 관계자기관장 전원을 경질하는 개각까지 단행하기에 이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었다. 이후 6월 항쟁이 일어난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그게 박종철 기념비인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사실 대다수의 학생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일부 단과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 탐방을 할 때 꼭 지나가는 코스이기는 하다.

당시 총학은 NL계열이 주로 장악했었기 때문에 NL계열의 '열사'들만 추모비를 크게 건립하고 박종철은 사안이 중요함에도 PD계열이라 작게 건립했었다.3)

김수환 추기경은 '박종철군 추모와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고 강론하며 고문 혐의를 부인하던 당국자들을 향해 "바로 카인의 대답이다"라고 일갈해 공권력을 꾸짖기도 했다.

안상수 前의원은 당시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고, 이후 문민정부 하에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놀랍게도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비록 박종운이 이부영 의원의 천거를 받아 민정계 인사를 제치고 공천을 받았다지만, 박종철이 왜 죽었는지, 한나라당의 주류가 누구인지를 아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박종운은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3연패를 하며 '오정의 낙선왕'이라는 야유와 함께 정계를 떠난다.

  • 출처: 엔하위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CC BY-NC-SA 2.0)

1)
다른 사람과 같이 구속된 것이 아닌 후일 구속됐다.
2)
후임 고건 장관
3)
여담으로 박종철은 PD계열이라기 보다 CA (제헌의회)계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PD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87년 이후이며 이전까지는 NL과 CA가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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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KB 박종철.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8/02/22 12:00 (바깥 편집) V_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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