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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즘적 성격장애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자아 장애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자신감의 약화이다. 자신감이 연약해서 자신을 천박하게 보거나 무능력하게 보거나 무가치하게 보는 것이 경계성 장애자들의 특징이고 자신을 "이 세상에서 최고"로 보는 즉 "자아가 인플레" 된 사람들이 나르시즘 장애자들이다. 서로 반대가 되지만 둘 다 심층에 있는 연약한 자아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 결과 대인관계가 파괴되는 것이 공통점이다.

대상관계 이론은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항가리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이었던 산도르 프렌치(Sandor Frenczi) 밑에서 18년간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던 멜라니 크레인(Klein)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크레인은 이후 독일의 정신분석학회 회장으로 있던 프로이트의 제자 칼 아브라함 밑에서 소아 정신분석학을 공부를 하다가 프로이트를 따라서 영국으로 망명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소아 정신분석 학자이다. 그녀가 어린이들의 심리적 문제를 치료하다가 어린 시절에 중요한 것은 아기와 엄마와의 관계이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오디팔 기간인 3세 - 5세의 자아 구조 형성에 밑바탕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프로이트가 강조한 3세-5세 보다 0세-3세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것이다. 크레인의 이론은 혁신적인 이론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 때 프로이트를 계승한 프로이트의 막내 딸인 안나 프로이트와 이론적 갈등을 보이게 되고 이후에 제자들이 서로 갈리게 되어 서로 반격과 공격으로 학파가 갈리게 된다. 크레인 학파를 대상관계 학파라고 부른다. 이 두 학파는 2차 대전 이후에 1945년 안나 프로이트와 메라니 크레인 사이에 서로 신사 협정으로 갈등을 해소하기는 했지만 구분된 학파는 이론적 차이 때문에 그대로 통합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안타 프로이트 학파는 고전적 정신분석 이론 학파로 크레인 학파는 대상관계 이론 학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크레인 학파는 이후에 페비안(Fairbairn)과 컨트립(Gurntrip), 위니코트(Winnicott), 비용(Bion), 볼비(Bowlby) 등의 정신분석학의 대가들을 배출하게 된다. 최근에 발달 심리학, 신경과학 등의 발달로 크레인의 대상관계 이론이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인간의 발달의 연구가 0세-3세로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 것이다.

크레인은 인간은 출생 이후에 엄마와 상호작용 관계를 통해서 엄마의 이미지가 마음 속에 그려져서 이것이 엄마의 실제 인물을 대신하는 대상 이미지가 되고 아기에 대한 엄마의 평가가 아기의 자아 이미지가 되어 이 두 개의 이미지 즉 대상 이미지와 자아 이미지가 통합되어 마음의 대리인인 자아(ego)가 된다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출생 후부터 엄마와 관계를 통해서 내면 속에 마음의 경험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즉 마음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엄마와 쌍방 관계를 통한 상호작용관계가 경험이 되어 마음 속에 심어진다.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관계는 아기의 마음 속에 심어지고 그려진다. 아기는 실제 엄마로부터 주변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다가 엄마에 대한 실망과 욕구 충족에 불만족이 아기로 하여금 엄마의 이미지를 마음 속에 만들 게 되어 실제 엄마를 대신해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마음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만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ego라는 자아이다. ego는 세부 조직으로 자신의 이미지인 자아 이미지와 엄마의 이미지인 대상 이미지로 되어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관계 즉 대인관계의 질이 내면의 마음 속에 그려져서 이미지로 바뀐다는 내면 대상 관계 이론이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수정과 보안을 거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내면에 그려진 대상 이미지와 자아 이미지는 서로 쪼개져있다. 아기가 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아기는 세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쪼갬 방어로 다루게 된다. 즉 엄마가 사랑을 주다가 어떤 때는 엄마가 처벌을 주게 될 때는 아기는 한 엄마가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준다는 것에 혼란하게 된다. 아기는 이것을 다룰 수가 없게 된다. 고로 사랑을 주는 엄마 즉 좋은 엄마와 처벌을 주는 엄마 즉 나쁜 엄마를 분리 시켜서 불안을 감소시킨다. 이후에 이렇게 쪼개진 자아들은 엄마의 사랑스러운 공감을 통해서 통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엄마는 사랑을 주는 사람인 동시에 미움을 안겨주는 한 사람임을 알 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엄마의 공감적 감정 지원에 달려있다. 아기는 출생 후에 엄마와 하나된 느낌 즉 너와 나의 하나된 느낌에서 시작된다. 엄마와 아기의 하나됨을 위니코트는 엄마의 거울반사(mirroring)라고 부르고 코호트는 엄마와 아기의 하나된 자아 즉 self-object라고 부른다. 나인 Self와 너인 object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느끼는 것에서 자아가 시작한다는 뜻이다. 엄마의 거울 반사라는 것은 엄마는 아기의 욕구를 거울처럼 반사시켜 아기에게 되돌려 주게되면 아기는 엄마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아기 자신의 모습이 마음 속에 그려지게 되어 이것이 아기의 자아가 된다고 위니코트는 말한다. 코호트는 출생 직후 아기는 자신이 엄마와 분리된 것인줄 모른다고 말한다. 고로 엄마와 하나된 자아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후에 아기의 자아가 분리되어 엄마와 아기는 독립된 자아로 구분화의 과정을 거친다. 출생 직후 아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취약하다. 그러나 엄마와 자신의 하나된 공감을 통해서 아기는 이 위험한 세상을 컨트롤해나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처음에는 엄마라는 실제 대상이 아기를 돌보아주고 아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아기는 자신이 스스로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아기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운다. 엄마가 눈에 보이고 옆에 있으면 잘 논다. 이것은 아직도 마음 속에 확고한 자아 감각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아기는 엄마를 상징하는 물건들 즉 엄마의 안경, 엄마의 옷, 엄마의 화장품 등이 엄마를 대리하는 것으로 보고 이 물건들을 보면 아기가 엄마처럼 마음에 안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점차로 엄마의 이미지가 마음 속에 확고하게 형성되어지면서 엄마라는 대상 이미지가 대신하게 된다. 이러한 물건들을 위니코트는 대리 대상(transitional object)라고 부른다. 아기가 3세 이후가 되면 엄마가 옆에 없어도 아기는 엄마라는 대상 이미지로써 자신을 달랠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을 대상의 영속성(object constancy)이라고 부른다. 출생 초기에 엄마와 아기가 하나로 느끼는 이 착각은 아기가 기고, 서고, 걷는 과정에서 몸소 스스로 세상을 대면하게 되면서 엄마로부터 불만족과 좌절에 따른 실망을 실제 엄마 대신에 엄마의 이미지로 마음 속에 새겨진 엄마 이미지를 통한 자아라는 마음의 대리인을 통해서 직접 스스로 세상을 대면해나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실제 대상이 아기의 마음 속에 심어지게 되고 이 대상이 실제 엄마가 옆에서 없어도 놀라지 않고 엄마를 대신해서 자신을 컨트롤하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마스터해나가게 된다.

0세-3세 사이에 엄마가 거울반사 혹은 엄마와 아기의 하나된 자아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을 때 아기는 쪼개진 자아를 통합해서 자아 이미지와 대상 이미지가 통합되어 ego라는 자아로 확고하게 머리 속에 그려지게 된다. 위니코트는 이것을 충분한 양육을 주는 엄마(good enough mothering)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엄마가 충분한 양육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쪼개진 자아는 통합되지 못하고 자아의 분열로 이어진다. 자아 분열은 이미 이야기를 했으니 지금부터는 나르시즘의 형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위니코트는 엄마가 아기의 스트레스와 불안과 두려움을 충분히 흡수해 주지 못하면 아기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즉, 살아남기 위한 자아 규제로써 원시적인 방어 기재에 의존하게 된다. 쪼갬, 투사, 투사 동일시, 부인 등을 동반하는 전지전능한 생각과 마술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위니코트는 이것을 충격 흡수 환경 안전한 환경 즉 holding environment라고 부른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서 전지전능한 생각, 마술적인, 초능력적인 사고에 빠지고 각종 상상 속에서 살 게 된다고 보았다. 코호트는 어린이가 1세 - 3세 사이에서 엄마와 아기의 하나된 자아 속에서 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엄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마치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은 착각에서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가 된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된다. 아기가 기고 서고 걸어다니면서 아기는 이 세상에서 안되는 일이 없는 "이 세상은 내 것이다" 즉 world is my oyster가 된다.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나의 각하 님!"이라고 불렀다. 부모들이 이 시기의 아기들을 나의 왕자님, 공주님이라는 칭호에서 마치 임금님을 대하는 것같은 호칭에서 따 온 말이다. 아기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이 다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 실제로 아기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님이 아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위니코트는 이 착각이 파괴되지 않아야한다고 말한다. 코호트는 이 착각의 파괴되지 않고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인 3세-5세 사이에 아기가 마음 대로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면서 주변 환경을 마스터하는 것을 배우면서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은 다 잘 되는데 "내가 하는 일은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좌절 때문에 세상을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다는 좌절에서 아기는 자아에 의존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즉 "이 세상에서 엄마, 아빠가 최고가 된다" "나는 크서 엄마, 아빠처럼 될 꺼야"가 된다. 즉 나르시즘이 최하가 된다. 내가 최고의 위치에서 내가 최하가 된다. 내가 최고의 위치는 나르시즘의 피크가 된다. 이 시기에 아기의 자아는 실제 자신의 자아가 아닌 거품자아이다. 이 거품이 걷히게 되면서 아기의 거품 자아는 자아 이상, 야심으로 바뀐다. 엄마, 아빠처럼 되겠다는 마음은 엄마, 아빠를 동일시하게 되고 자아의 마스터 감각은 확대된다. 아기의 실제 자아가 거품이 걷히면서 동일시를 통해서 형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제 자아의 발달은 급 스피드를 타게된다. 5세부터 유치원에 가면서 ego의 습득 기능의 증진으로 배움에 가속이 붙게 된다. 이것이 건강한 자아 발달이다. 건강한 자아 발달에는 건강한 나르시즘이 필수적이다. 내가 최고가 파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위니코트와 코호트의 강조점이다.

내가 최고가 충족되지 못하면 아기는 스스로를 방어하게 된다. 부모님이 보호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내 자아를 보호해야 한다. 이것 때문에 너와 나의 하나된 자아가 분리되어 자아와 대상으로 나누어지지 못한다. 따라서 거품 자아가 분리되지 못하고 남아있게 된다. 과장된 자아를 포기 못하게 되고 이상화의 빈 자리는 이후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 자리를 채우려고 이상화 인물에 매달리게 된다.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된다. 이상적인 대상을 끝임없이 찾는다. 나르시즘이 ego의 형태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나르시즘의 고착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나르시즘 고착이라고 부른다. 나르시즘이 그 자리에서 성장이 멈춘 것이다. 고로 끝임없이 나르시즘의 욕구를 충족 시키려고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내가 최고는 1세 -3세 사이에서는 수용이 되지만 어른이 되어서 내가 최고는 대인관계의 파괴로 이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내가 최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하수인 역할을 해야 한다. 친구는 내 나르시즘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현실을 거부하고 이상 속에서 산다. 이상을 갈구한다.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거나 비판을 하면 그 사람은 나의 적이 되어 버린다. 이상적인 대상을 발견하면 그 대상을 이상화해서 접근하지만 조금이라고 단점이 발견되면 그 대상은 평가절하되어 최하가 되어 버린다. 외부로부터 칭찬, 존경에 목말라한다. 끊임없이 부(富), 명예, 성공, 미(美)에 집착한다. 성공을 해도 만족이 없는 사람이 된다. 공감의 능력이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줄 모른다. 다른 사람은 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나르시즘적 자아 장애자로 부른다. 사람들이 능력이 있으면 존경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나 나르시즘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모임이나 행사에서 내가 최고로 대접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책임있는 일을 맡게되면 실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을 망쳐 버린다. 고로 사람들의 비판, 비난을 받게 되면 관계를 끊어 버린다. 인간 관계가 파괴되어 버린다. 진실한 친밀관계가 없다. 모든 인간 관계는 이익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상호 공감이나 감정 교류가 없다. 능력이 없으면서 큰 소리를 친다.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유는 공감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을 인정할 수 없고 감정을 서로 나눌 수가 없다. 상대를 내 만족의 도구로 욕구 충족의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코호트의 나르시즘 자아에 대해서 더 상세하고 알고 싶으신 분은 코호트의 나르시즘 이론에 들어가보세요..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아놀드 모델(Arnold Modell)은 나르시즘 자아를 코호트와 약간 다르게 설명을 한다. 부모가 자녀의 나르시즘 욕구를 충족 시켜줄 때 자녀는 부모의 완벽하지 못한 양육에 실망을 하게 된다. 즉 좌절과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부모가 완벽하게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모의 좌절에 불만족을 느낀 자녀는 부모로부터 욕구 충족에 실망해서 스스로 욕구 충족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이것이 자치심의 발달로 이어진다. 부모가 해 주지 못하는 것을 내 스스로가 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실망이 자아 개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 발달이다. 그러나 부모가 어린 시절에 욕구 충족에 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내 자식을 어떤 일이있드라도 어린 시절에 나처럼 양육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다. 결혼 후에 자녀가 태어나면 아기의 욕구 충족에 모든 것을 다 바치게 된다. 아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해주게 된다. 즉 완벽한 욕구 충족을 추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 결과 아기는 스스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데 왜 내가 할 필요가 있겠느냐가 된다. 즉 완벽한 충족은 스스로 욕구를 충족시켤 필요성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코호트도 이점을 인정하였다. 코호트는 부모가 자녀의 욕구를 충족 시켜줄 때 "최고 적합한 좌절"을 제공해주어야 함을 강조한다. 최고 적합한 좌절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방기, 처벌하는 것과는 다르다. 좌절이 없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쉽게 말해서 부모가 자녀를 과잉 보호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과잉 보호를 받고 자란 자녀는 부모에 의존적이 된다. 자치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든 것을 부모에 의존하려고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가 원하는 것에 No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 이유는 어린 시절에 부모 자신이 욕구 좌절 때문에 고착이 되어 한이 맺혔기 때문이다. 자녀의 욕구를 거절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사랑을 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를 과잉 보호를 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불가능한 것을 약속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다 제공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녀는 좌절에 참을 수 없게 된다. 즉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성질을 부린다. 울거나 딩굴거나 고함을 지른다. 부모는 안전부절 못하고 사랑을 주지 못했다고 죄의식에 빠진다. 결국 자녀는 자신의 욕구 충족에 불만족하게 되고 좌절에 참을 수 없고 자신의 욕구 충족이 모든 것보다 우선하게 된다. 내가 최고로 대접을 받아왔으니 어른이 되어서도 습관화되어 어디를 가든지 간에 내가 최고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내가 최고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된다. 자녀는 자신의 욕구를 즉각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부모에게 분노하고 적대적이 되고 부모를 처벌하게 된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해 가면서 자녀를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 자녀의 안하무인 행동에 어쩔줄을 모르게 된다.

최근 KTX 고속 열차를 타고 가다가 5세된 남자 어린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게 고속철을 타고 자리를 찾아서 기차 안으로 들어와서는 이 소년이 자신의 자리가 창문가가 아니고 안쪽인 것을 알고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이 자리 말고 창가에 있는 자리가 더 좋으니 창가에 앉게 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을 보았다. 그 어린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즉각 자신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자 울고 불고 난리를 피웠다. 아무리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설명을 해도 온 기차 안이 떠날갈 듯이 울고 고함을 지르고 야단법석을 떨자 기차 안에 있던 손님이 자신의 창문가의 자리를 그 어린이에게 양보해서 끝나는 것 같았으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리가 자신의 옆자리가 아니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자신이 할아버지, 할머니 옆 자리의 창문가에 함께 앉겠다고 떼를 쓰고 울고불고 야단을 첬다. 결국은 손님들의 양보로 자신의 욕구 대로 되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난처해서 어쩔줄 모르고 아무리 손자를 달래고 얼려도 막무가네였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이 어린이는 자라서 나르시즘적 자아 장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세상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게 되면 좌절과 분노, 실망 때문에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에 대한 분노에 참을 수가 없게될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사회 심리학의 세계적 대가인 호주 뉴 사우스 웨일 대학의 교수인 죠셉, 포르가스(Joseph Forgas)는 실험실에서 나르시즘 자아를 가진 사람들을 실험한 결과를 "사회적 마음(The social mind)라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르시스트들은 자신의 긍정적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의 사회적 피드백에 의존해있었다. 즉 칭찬과 존경에 목말라 했다. 자신의 자신감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과도하게 의부 대상에게 의존해 있었다. 외부 세게를 조작해서 자신의 자신감을 우수한 능력의 증거로 쌍방적 평가가 아닌 일방적인 평가로 인플레 시키고 있었다. 독단적인 일방적 평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아의 연약함을 입증한 것이다. 긍정적 자아 착각을 객관적 증거가 없는데도 사용하고 있었다. 쌍방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르시즘의 자아는 연약하다. 자아 의심이 많고 불확실하다. 자아를 과장 시킴으로서 대인관계를 파괴 시킨다. 갈등을 창조한다. 순간적인 성취에 만족한다. 관계 패턴이 과장된 감정 반응행동을 보였다. 임상적 관찰과 각종 실험은 나르시스트들이 과대 과장 자아를 가지고 있고 자아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점이었다.

나르시즘은 과장 과대적 자아 개념과 관계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자신감은 아니었다. 다른 말로하면 나르시스트들의 자아 기술은 긍정적이지만 그들은 존경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과장 과대 자아는 두 가지 모순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아를 과장되게 본다. 이상적 자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 위협이 있을 때 과장 과대적인 사람은 눈에 띄지 않게 과장된 자아를 취했다. 자아 평가가 고도로 불안정했다. 내면 세계가 안정되어있지 못하고 외부의 결과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자아가 불안정하다는 증거이다. 자신감이 높은 건강한 사람들은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의 의미를 과도하게 일반화 시키지 않았다. 평소에 자아가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즘 환자들은 피드백을 모두 자아 인정에 사용하고 있었다. 나르시스트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다시 보여주도록 요구를 하면 불안해했다. 자신을 믿지 못했다.

나르시즘적 자아는 응집력이 부족하고 내면이 텅 비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고 이 텅빈 공허한 자아에 존경, 칭찬으로 채워넣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르시스트들은 높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높은 자신감이 진실된 자신감이 아니고 자아 방어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 자신감이 아니기 때문에 외부 대상의 칭찬과 인정에 의존해있는 자신감이었다. 자아 감각을 높이는데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감의 질이 낮기 때문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과장된 자아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상적인 자아 인플레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르가스(Forgas)는 나르시즘을 6개 분야의 결함으로 보았다.

  • 1) 자아에 결함
  • 2) 대인관계에 결함
  • 3) 사회적 적응에 결함
  • 4) 윤리 표준과 이상에 결함
  • 5) 상실과 섹스화에 결함
  • 6) 인지 스타일에 결함을 들고 있다.

포르가스의 데이터는 코호트와 모델(Modell)의 나르시즘에 대한 주장과 일치 한다는 점이다. 나르시즘적 자아를 가진 자아 장애자들은 높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존경과 인정을 받아야 하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자신감이 진실로 내면의 세계의 가치에서 오는 것이라면 궂이 외부 대상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성장 배경

부모의 과장된 사랑이 수년간 지속된다면 어린이는 이 태도를 내면화 하기 쉽고 비현실적이 된다. 다른 사람도 욕구, 견해,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 Freud는 부모의 과장된 어린이에 대한 찬사는 부모 자신의 어린시절의 나르시즘 단계의 재 등장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나르시즘 환자의 부모는 자녀의 나르시즘에 집중함으로써 부모 자신의 실망을 해결한다. 유아기 이후에 부모의 찬사를 계속한다는 것은 파괴적이다. 현실에 근거를 둔 skills을 개발해야 한다. 정상적인 어린이의 부모는 모든 사람이 취약점을 가지고 있고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교육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린이는 거짓 영광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Freud는 대상으로 향하는 에너지가 ego에 붙어서 ego가 과장되었다고 본 것이 최초의 나르시즘에 대한 설명이었다. 대상관계 이론가들은 자아 문제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양육자와의 어린시절에 관계의 결함이 나르시즘 문제의 근원으로 본다. 표면적으로는 자아가 과장되어 있지만 내면으로는 만성적인 공허감, 수치심 속에 쌓여 있다. 나르시즘 성격장애자들은 자아가 완벽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자아에 조그만 결함에도 참을 수가 없다. 병적인 나르시즘은 부모의 과대평가의 결과로 본다. 정신분석학 안에서도 나르시즘 이론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서로 대립된다.

정신분석 학자인 Kernberg는 너의 이미지와 나의 이미지가 통합되지 못하고 융합된 것으로 본다. 나르시우스들은 이상적 자아, 이상적 대상, 자아 이미자가 융합되어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자아 이미지와 이상적 이미지의 융합(나의 이상과 너의 이상의 융합)이 과대망상과 전지전능함으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 발달 초기에 구순기 때에 고착이 일어나서 그 상처에 대한 방어로 본다. 병적인 나르시즘 장애자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제공해 주지 못한 양육자에 대한 구순기 분노가 숨어 있다. 이 분노는 나르시스트들을 비판하여 찬사를 제공해 주지 못하면 폭발한다. 분노해서 대상을 무자비하게 평가절하 해 버리는데 사용한다. 과장된 자아 일수록 연약한 자아가 내면에 숨어 있기 때문에 한층 더 비난, 비판에 예민하게 되고 구순기 분노에 쉽게 빠진다.

정신분석 학자인 Kohut는 유아기에 엄마의 공감 실패가 자아에 결함을 가져 온 것이 나르시즘의 과장된 자아가 된 것으로 본다. 출생시 유아는 자아가 없다. 고로 점차로 사랑은 외부에서 옴을 알 게 되고 엄마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엄마의 자아와 아기의 자아는 하나가 된다. 이것을 너와 나의 하나 된 단계 즉 나의 글자인 self와 너의 글자인 object가 붙어 있는 글자인 selfobject라고 부른다. 부모를 이상화 하고 자신을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시기이다. 정상적 공감에 의해서 너와 나는 분리되어 self와 object는 떨어져 나와서 독립된 개체인 self와 object가 된다. 여기서 분리된 과장된 자아는 ego ideal 즉 나의 미래의 이상이 되어 초자아에 붙게 된다. 이 단계에서 엄마의 공감 실패가 자아의 결함을 낳게 되고 이 자아의 결함에 대한 방어가 과장된 자아 즉 나르시즘 자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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