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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2015/02/20 15:08] V_L전태일 [2019/04/05 08:45] (현재) – [전태일] V_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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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 대구 (당시 대구부 남산정) 출생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 대구 (당시 대구부 남산정) 출생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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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아무도 불을 끄거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고,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3~4시간 방치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1],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3~4시간 방치하였다.+====생애 ====
  
-[[대한민국]]의 노동자, 노동운동가.  [[대구광역시| 대구]] 태생.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아버지가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어렸을 때부터 정말   가난했고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보조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재단사로 일하던 중 재단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박봉,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내용을 독학하려 하였으나 기준법 전문이 [[한자]] 투성이인지라 도통 내용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전태일 평전』))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며 읽었고 그렇게 읽어낸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재단사로 취직이 돼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벽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로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사회주의 조직이라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국 노동운동의 아이콘적 인물. 1960년대 청계천의 봉제공장의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 권리를 위해 노력하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자 22세의 나이로 근로기준법 과 함께 분신자살다.(( 후술하지만,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상태의 전태일 열사의 뒤에 있던 익명의 친구가 불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전태일은 분신에 대해 미리 해두고 이는 곧 분신자살이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살고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이분에게 빚을 지고 있다.+당시 한국에는 비록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형식적이었으며 감독관청도 혀 이를 지키려 지 않았다. 전태일의 노동자의 을 개선겠다는 뜻은 좋았지만, 당시의 경제현실서는 기 힘든 꿈이었다.
  
-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로 노동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라 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시민 전체가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과 당사자 집단인 노동자 계층 전체가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계기로 대오각성하게 되었으며 이후 노동계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노태우 정부 이후부터 급격한 처우 개선과 임금 상승이 병행하게 된다. 그 덕분에 한동안 [[지니계수]]가 서유럽 국가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는...+1970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고작 253달러에 불했고, 265달러인 파푸뉴기보다도 한 빈곤국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근로준법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지켜지기는 불가능했다. 
  
-==== 약력, 전태일의 과 죽음 ==== +또한 근로기준법 자체가 북한과의 체제경쟁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그것이 실제 지켜질 것이라고는 입법을 추진한 당국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물론 지키지도 않을 법을 만든 것도 문제긴 해도, 국가 성립 자체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입법 및 행정의 총제적인 부실현상이 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무척 다다감한 성격에 특히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지 않는 의 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4.19 혁명]] 직후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 가족이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고(( 밥을 제때 못 먹는 일은 그야말로 약과에 불과했으며 이는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절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보조로 취직게 된다. 이후 재단사로 일하던 중 재단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박봉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전태일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 사전에 자신의 친구 김개남에게 자신의 몸에 성냥을 그어 달라고 하였었으나익명의 친구가 뒤서 불을 였다. 
  
-러던 중 '**근로기준법**' 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내용을 독학려 하였으나 기준법 전문이 [[한자]] 투성이인지라 도통 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면, 또는 대학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한탄했다고 다.(( 현재는 법률 전문을 한글로 열람 가능하다.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122686&efYd=20120802#0000|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근로기준법]] 항목이 . 그래봤자 예나 지금나 법률 용어라는 이 일반이 이해기 무척 힘든 말로 꼬아놔서 알아듣기 힘들다.))(『전태일 평전』을 해 알려진 그의 이한 생각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현실 참여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를 구입여 밤낮을 안 가리며 읽었고(( 말이 해설서지 여전히 법률 용어 투성이였기에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전태일에겐 악전고투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에 살던 **광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나이 든 대학생을 자주 찾아가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해설서 한 페이지 읽는데 하루를 꼬박 새운 적도 있다고.)) 그렇게 읽어낸 근로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자 노력한다. 그러나 막장 현실 속에서--지금도 [[막장]]...-- 봉제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더 상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다.+는 자신을 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 우리는 기계가 아니!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 라고 외쳤다. 그러나 주변의 상인들이나 동료들도 불을 끄거나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하지않았다. 근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측에서 보호가 없고, 병원비에 대한 보증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응급치료 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지 않았다. 근로 감독관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당시 상황이 위중해 비싼 주사를 맞아야 했으나 주사 한대의 가격이 노동자 달월급정도 였다고 한다. 따라서 근로감독관도 쉽게 허락기는 려웠을 것이다.  결국 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게 "**어머니, 내가 못 다 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는 을 유언으로 남기고 당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말은 "배가 다..." 였다.(( 는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은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
  
-1970년 재단로 취직이 돼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 바보회 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실태 설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로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사회주의 조직라 빨간 딱지를 붙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안 정치적 의미에서의 반독재,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지식인들은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노동자,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의 대학생은 지금보다 훨씬 수도 적고 그야말로 엘리트로의 길이 보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취업자'로 호도도 하였다. 
  
-당시 국에는 비록 그럴싸한 근기준법은 있었으나 이토록 형식이었며 감독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에 은 비애를 느낀 전태일은 결국 죽음으로 그 을 알리는 길을 택게 된다.+한 노동자들 스스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고자 자주적으로 노조를 세우는 노력을 고 이에 따라 70년대 중에 청계피복노조 이외에도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YH 사건]]의 그 회사)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세워져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운동한다. 이렇게 70년대에 세워진 민주노조는 대부분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집약적 사업장 위주로 세워졌으며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룹]], [[대우그룹]] 등 [[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조가 대거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찢겨지고 짓밟히자 전태일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사전에 자신의 친구 김개남에게 자신의 몸에 성냥을 그어 달라고 말했던 것에 따라, 익명의 친구는 뒤에서 불을 붙였고, 이 사회에서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 을 갖고 자신도 그 불에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 
  
-그는 자신을 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라고 외쳤다. 그리고 부근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측에서도 환가 **돈이 없다**(( 후에 교수님이 술회길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당시 회상이...)) 이유로 본적인 응급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요**" 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당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말은 "배가 고프다..." 였다.(( 그는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은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일생이 배고픔 그 자체였다.))+일은 모범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 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던 업체들에게 직공의 근로여건 개선을 촉구는 시발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자본금이 부족여 좌절되다. 획서까지 만들어 두고 작업장 배치와 근로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두었다.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정치적 의미에서의 반독재,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 지식인들은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노동자,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의 대학생은 지금보다 훨씬 수도 적고 그야말로 엘리트로의 길이 보장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이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취업자'로 호도하기도 하였다.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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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노동자들 스스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자주적으로 노조를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에 따라 70년대 중에 청계피복노조 이외에도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YH 사건]]의 그 회사)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세워져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운동한다. 이렇게 70년대에 세워진 민주노조는 대부분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집약적 사업장 위주로 세워졌으며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조가 대거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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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전태일의 태몽이 굉장히 의미심장했다고 한다. 전태일의 어머니가 방에 앉아있다 방문을 열었더니 크고 밝은 태양이 가슴으로 달려들었다고 한다. 태양은 가슴에 부딪혀 산산조각났고 그 조각들은 방 곳곳에 흩어져 반짝이며 어둠을 밝혔다고 한다. 인권의 암흑기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전환시킨 전태일의 삶과 많은 부분 겹친다고 할 수 있겠다.+
  
-전태일은 모범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 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던 업체들에게 직공들의 근로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자본금이 부족하여 좌절되었다. 사업기획서까지 만들어 두고 작업장 배치와 근로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두었다.....+{{http://z4.enha.kr/http://rigvedawiki.net/r1/pds/leesosun.jpg|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소선}}
  
-{{http://z4.enha.kr/http://rigvedawiki.net/r1/pds/leesosun.jpg}}?align=center 
  
-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 이후 이소선 여사의 삶은 아들 전태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들, 딸들의 말을 지켜주기 위한 어머니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한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로서 이소선은 아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청계피복노조 등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주화운동 유가족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같은 해 9월 3일 작고하였다. 그녀의 말년의 삶을 다룬 영화로 태준식(( 노동운동 영상 제작 그룹인 '노동자뉴스제작단'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 [[쌍용자동차]] 공장 점거 파업과 그 이후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당신과 나의 전쟁' 등이 대표작.)) 감독의 '어머니' 가 있다(아래의 영화 '어머니' 와는 다른 작품).+이후 이소선은 아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청계피복노조 등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주화운동 유가족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같은 해 9월 3일 작고하였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 씨는 오빠의 뒤를 따라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통합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남동생 전태삼 씨 역시 노동운동에서 활동하였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 씨는 오빠의 뒤를 따라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통합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남동생 전태삼 씨 역시 노동운동에서 활동하였다.
  
 ==== 전국노동자대회 ==== ==== 전국노동자대회 ====
-매년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 11월 13일에 민주노총 주관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11월 13일이 주말이 아닌 평일이면 11월 13일 직전의 주말에 열린다. (( 예를들어 2014년 11월 13일이 목요일이기 때문에, 2014년 노대회는 11월 8일 토요일에 전야제, 11월 9일 일요일에 본대회가 열린다.)) 한국 최대 노동조합인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총대회를 전태일 열사 기일에 여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동현안에 대한 의제가 기조로 설정되며, 전야제는 주로 문화제 형식으로, 본대회는 집회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열사에 한 추모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다.+매년 전태일이  죽은 11월 13일에 민주노총 주관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11월 13일이 주말이 아닌 평일이면 11월 13일 직전의 주말에 열린다. 한국 최대 노동조합인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총대회를 전태일 열사 기일에 여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동현안에 대한 의제가 기조로 설정되며, 전야제는 주로 문화제 형식으로, 본대회는 집회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 박정희 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 
 +이 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줄 77: 줄 76: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참고로 이 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 수기 ==== ==== 수기 ====
줄 97: 줄 95:
 > - 1969년 9월의 수기에서 > - 1969년 9월의 수기에서
  
-==== 보수 측의 주장에 대한 반박 ====  +==== 비판 ==== 
-이에 대해 보수 측에서는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뜻은 좋았지만, 당시의 경제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고 얘기한다.+
  
-선 1970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고작 253달러에 불과했고, 265달러인 파푸아뉴기니보다도 못한 빈곤국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근로기준법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지켜지는 불가능했다는 것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들먹이며 대놓고 어기는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노동자의 삶을 개하겠다는 뜻은 좋았지만, 당시의 경제현실에서는 기 힘든 꿈다.
  
-한 근로기준법 자체가 북한과의 체제경쟁 정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그것이 실제 지켜질 것이라고는 입법을 추진한 당국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물론 지키지도 않을 법을 만든 것도 문제긴 해도, 국가 성립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입법 및 행정의 총제적인 부실현상이었다고 아야 한도 주장한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지도 않을 을 만든 것이 문제라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이미 이 논리도 하기 짝이 다. +우선 1970년 당시 의 국민소득은 고작 253달러에 불고, 265달러인 파푸아뉴보다도 한 빈곤국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근기준법이 있다고 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지켜지기는 불가능했다. 
  
-편 당시에 성행하던 노동자 간 착취의 제에 대해는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단점으로 들기도 한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옥죈 것은 바로 '오야지'(( 일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말 중 하에서 유래한 으로 보인다))라 불리는 숙련공들었고, 이들은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견습생들로부터 웃돈을 받거나 그들의 임금을 가로채는 등의 횡포를 저렀다. 이를 근거로 전태일 본인도 재단사였으므로 동료 재단사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는 한편, 오늘날의 노에서도 이러한 악/폐습이 그대로 이어게 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는 이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말도 안된다. 전태일 씨의 행동은 그 동안 금기시되어왔던 노동문제를 수면위로 떠올리게 했다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당시 존재하던 모든 노동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건 전지전능한 신게나 할 소리다.(( 전태일이 처음 재단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재단사 등의 숙련공들이 임금 문제 등에서 주과 타협하여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방조하는 황을 적어도 자기만은 막아 보려고 했던 데에 있다. 것을 보면 소위 '노동자간 착취'의 문제를 '주인'과 그에 협조하는 '상위 노동자'들에게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혼자 시도한다고 될 일이 니라는 것을 알고 동료 재단사 조직을 시도한 것이 '바보회'이다. 그리고 그의 노동운동에서 시종일관 지속되었던 가장 큰 요구 중의 하나가 바로 '시다'의 임금 인상이다. 이쯤되면 '당시 존재하던 모든 노동문제'를 '꺼내지 않은 것'이 맞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 쪽 주장의 경우에는 현재의 노조들과 노동 운동을 비난하기 위해 당시의 노동 운동까지 소급해 책임을 물으려 하는 불순한 저의가 담겨져 있다.+한 근로기준법 체가 북한과의 경쟁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만큼그것이 실제 지켜질 것이라고는 입법을 추진한 당국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었고, 물론 지키도 않을 법을 만든 것도 문제긴 해도, 국가 성립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입법 및 행정의 인 부실현상이다고 아야 한다.
  
-는 전태일의 이 아무도 지 못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이 부분은 명백히 틀린 것이 전태일의 죽음 이후 1971년도에 전년도 대비 10배 넘는 노동운동이 집계되어 노동청이 실태 조사분 개정을 하기도 했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도 전태일을 거론하며 제도 혁신 등을 이야기한 바가 다. 거기다 전태일 이후에도 비슷한 분신 시위 사례가 나왔고, 이를 언론이 취하면서 "한 람의 죽음"으로 하하는 게 불가능해졌으며종교계에서도 직간접적인 지원과 미사를 벌이는 등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부분을 봐도 이 사건이 우리나라 노동 환경에 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의심의 여가 없는 사실이. 그럼에도 이걸 인정하기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은 선동이네 특정 세력에 이용당하는 거네 하며 폄하하기 바쁘지만..+한편 당시에 성행하던 노동자 간 착취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모순된 점이다. 그 당시 노자들의 삶을 더욱 옥죈 은 로 '오야'(( 일본어로 '아버'를 뜻하는 말 중 하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라 불리는 숙련공들이었고, 이은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견습생들로터 웃돈을 나 그들의 임금을 가로채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이를 근로 전태일 본인도 재로 동료 재단사들을 비판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는 한편오늘날의 노조에서도 이러한 악/폐습이 그대로 게 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이 밖에도 또 다른 현실타협적 관점에서, 당시 전태일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생활고를 고려했을때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지, 노동자 인권이라는 거대하고 높은 목표에 대한 열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분신 이전 전태일의 행동, 이를테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에 대한 서적을 찾아가며 공부했다는 것과 재단사들 사이에서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었다는 것 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주장은 전태일의 행적이나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지 않은 채 그 당시 어려웠던 사회상을 모든 인물에게 대입해 확대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태일의 행동이 당시에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으나, 이 사건이 우리나라 노동 환경에 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 밖에도 또 다른 현실타협적 관점에서, 당시 전태일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생활고를 고려했을때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지, 노동자 인권이라는 거대하고 높은 목표에 대한 열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분신 이전 전태일의 행동, 이를테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에 대한 서적을 찾아가며 공부했다는 것과 재단사들 사이에서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었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한다. 
  
-==== 미디어 ==== 
-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영화. [[홍경인]], [[문성근]] 등 출연. 
  
-{{http://imgmovie.naver.com/mdi/mi/0175/A7577-00.jpg}}&align=center 
  
-  * 전태일 평전 - 장기표씨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전태일의 수기를 저자인 인권 [[변호사]] [[조영래]]씨가 정리, 집필한 것. 1971년 일본에서 초판,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이란 제목으로 저자명 없이 국내 해적 출판, 1991년 1차 개정판에 와서야 저자 이름을 밝힌 책을 출판했다. 참고로 저자인 조영래씨는 1990년 12월 12일 지병인 폐암으로 타계. 자세한 사항은 [[조영래]] 항목참조. 전태일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이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이름이 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0320|이마트에서는 전태일 평전을 불온도서로 취급하고 있다]]**(( 이마트 뿐만이 아니라 노조가 생길려고 하면 없애기 바쁜 대다수의 기업들이 전태일 평전이 사업장 안에서 돌아다니는걸 싫어한다, 대놓고 뺏으면 뭐하니 이런책을 읽으면 된다 라면서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 식의 책들을 권하거나 사서 비치해놓는 경우도 종종 보일지경, 이정도면 병이다))(...) +==== 고 ====
- +
-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구술기록. 오도엽 저. +
-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상기 영화의 시나리오. 이창동 저. +
-  * 완전에 가까운 결단 - 전태일열사 탄생 60주년 기념시집. 박문길 외 저. +
-  * [[http://efktu.or.kr/~juntaeil2009/commonmenu/DocView.html?SID=29&nextpage=01&DSID=29|만화 전태일]] +
-  * [[어머니]] - 일본의 한국민주통일연합(약칭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에서 제작한 영화. 1978년 작품으로 당시 열악한 한국의 노동환경을 해외에 알리고 민주주의 회복을 세계에 호소하는 영화로 알려졌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들이 몰래몰래 복사한 비디오 테이프로 돌려봤다 한다. 전태일 열사에 관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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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링크 ====+
   * [[http://www.chuntaeil.org|전태일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www.chuntaeil.org|전태일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7/h2007071117560484210.htm|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한국일보 기사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7/h2007071117560484210.htm|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한국일보 기사
  
-  * 출처: 엔하위키- 전태일(CC BY-NC-SA 2.0)+  * 엔하위키- 전태일(CC BY-NC-SA 2.0) 
 +  * [[http://ko.wikipedia.org/wiki/전태일|]] 
  
  
-{{tag>전태일 사건사고 자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