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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2015/02/21 00:14] V_L박종철 [2021/07/31 15:46] (현재) – 이전 판으로 되돌림 (2015/02/20 19:44) 172.70.12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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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철 ====== ====== 박종철 ======
  
-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광역시 출생)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군사독재정권의 불의는 당연히 민중들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인 6월 항쟁의 계기가 되어,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민주정의당 당대표 및 대통령 후보자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6·29 선언(六二九宣言)을 1987년 6월 항쟁 직후인 6월 29일 발표하게 되었다.+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광역시 출생)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군사독재정권의 불의는 당연히 민중들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인 6월 항쟁의 계기가 되어,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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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사건의 파문이 크게 번지면서 오히려 장세동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대국민적 저항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497.html|관련기사]] 참조. 그런데 이 사건의 파문이 크게 번지면서 오히려 장세동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대국민적 저항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497.html|관련기사]] 참조.
  
- +이것이 앞에서 말한 비밀서신을 통해 세상에 은밀히 전해졌고 이를 공개한 사람들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1987년 5월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난다. 처음 [[제5공화국]]은 보도지침과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고 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51900329207016&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7-05-19&officeId=00032&pageNo=7&printNo=12811&publishType=00020|현재 네이버의 옛날 신문에서 1987년 5월 19일자 신문을 검색하면 아주 조그맣게 기사가 나온다.]]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하면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에야 비로소 크게 보도가 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직접 찾아보시라.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했고,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의 사법처리를 타진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의 판단은 알아서.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했고,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한다. 덮을 생각이 없었고 3명의 사법처리를 타진하고 있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이다. 사실인지의 판단은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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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5월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서울지검으로 데려왔고. 공동정범 3명(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이 구속되고 그 뒤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상부 간부 4명(강민창 전 치안본부장(현재의 경찰청장)(( 다른 사람과 같이 구속된 것이 아닌 후일 구속됐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이 구속된다.  결국 5월 22일, 경찰은 공동정범 3인을 스스로 연행해 서울지검으로 데려왔고. 공동정범 3명(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이 구속되고 그 뒤 이를 은폐하도록 지시한 상부 간부 4명(강민창 전 치안본부장(현재의 경찰청장)(( 다른 사람과 같이 구속된 것이 아닌 후일 구속됐다.)),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이 구속된다. 
  
-무고한  대학생을 고문해서 죽이고도 모자라, 진실을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일반인조차 분노에 들끓었고, 따라서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후임 [[고건]] 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 등 관계자기관장 전원을 경질하는 개각까지 단행하기에 이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었다. 이후 [[6월 항쟁]]이 다.+무고한 ((당시 박종철 군은 박종운의 소재를 묻기 위한 참고인으로 소환됐고 범인도피죄 혐의도 없었다. 즉 무고하다는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대학생을 고문해서 죽이고도 모자라, 진실을 은폐하고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일반인조차 분노에 들끓었고, 따라서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전두환 정권은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후임 [[고건]] 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이영창 치안본부장 등 관계자기관장 전원을 경질하는 개각까지 단행하기에 이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었다. 이후 [[6월 항쟁]]이 발발, [[제5공화국]]은 그 명을 끝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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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당시 경질된 고위인사들은 그뒤에도 잘먹고 잘살고 있다. 김성기 법무장관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주택은행 이사장으로 출세했다. 사건 은폐축소를 시도했던 정구영 검사장은 노태우 정권에서 검찰총장이 되었고, 이를 진두지휘했던 서동권 검찰총장은 안기부장으로 3년 6개월 간 재직하면서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하였다. 정호용도 13대, 14대 모두 대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서 정치활동을 이갔다. 이영창 치안본부장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북 경산-청도에서 당선되었다. 박처원 치안감은 출소 후에 고문경찰관들의 대부역할을 하면서 [[이근안]]의 은신도피를 지원했고,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고문치사사건의 담당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현재 대법관 후보자로 내정되어 있다. 결국 박종철군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건 말단 경찰관들 몇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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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그게 박종철 기념비인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사실 대다수의 학생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일부 단과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 탐방을 할 때 꼭 지나가는 코스이기는 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는 박종철이 당했던 고문을 형상화한 박종철 열사 기념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그게 박종철 기념비인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사실 대다수의 학생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일부 단과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으로 학교 탐방을 할 때 꼭 지나가는 코스이기는 하다.
  
-당시 총학은 **[[좌빨#NL]]계열**이 주로 장악했었기 때문에 NL계열의 '열사'들만 추모비를 크게 건립하고 박종철은 사안이 중요함에도 **[[좌빨#PD]]계열**이라 작게 건립했었다.(( 여담으로 박종철은 PD계열이라기 보다 [[CA]] (제헌의회)계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PD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87년 이후이며 이전까지는 NL과 CA가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었다.)) +당시 총학은 **[[NL]]계열**이 주로 장악했었기 때문에 NL계열의 '열사'들만 추모비를 크게 건립하고 박종철은 사안이 중요함에도 **[[PD]]계열**이라 작게 건립했었다는 [[카더라]]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여담으로 박종철 열사는 PD계열이라기 보다 [[CA]](제헌의회)계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PD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87년 이후이며 이전까지는 NL과 CA가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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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은 '박종철군 추모와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고 강론하며 고문 혐의를 부인하던 당국자들을 향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고 일갈해 공권력을 꾸짖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박종철군 추모와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고 강론하며 고문 혐의를 부인하던 당국자들을 향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고 일갈해 공권력을 꾸짖기도 했다.
  
-안상수 前의원은 당시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고, 이후 문민정부 하에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하다.+[[크라잉 넛]]의 노래인 [[지독한 노래]]에 나오는 가사 **"탁 치니 억 죽고 물 먹이니 얼싸 죽고 사람이 마분지로 보이냐"**는 이 사건을 비꼰, 아니 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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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수 前의원은 당시 이 사건의 담당검사였고, 이후 문민정부 하에서 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으로 자신이 **주동적**으로 사건 은폐를 막았다고 주장고 있으나, 조국 서울대 교수는 안상수가 아니라 그 상관인 최환 부장검사가 박종철 시신의 부검을 지시하여 이의 은폐를 막았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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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으로 [[서울대학교]] [[조국]] [[교수]]는 박종철의 고등학교, 대학교 직속 선배 관계이다. 그런데 학교(학령기 시작 연도)는 한살 더 일찍 들어왔고 박종철은 재수하여 선배지만 나이는 더 어리다. 여튼 그의 진보적 성향에는 후배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고 이후 [[제18대 대통령 선거]] 찬조 연설에 본인이 직접 나와서 이때의 경험이 자신의 정치성향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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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놀랍게도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비록 박종운이 이부영 의원의 천거를 받아 민정계 인사를 제치고 공천을 받았다지만, 박종철이 왜 죽었는지, 한나라당의 주류가 누구인지를 아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박종운은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3연패를 하며 '오정의 낙선왕'이라는 야유와 함께 정계를 떠난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종철이 고문당하고 죽은 이유가 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은 놀랍게도 2000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박종철을 죽게 한 5공화국 정권의 여당 [[민주정의당]]은 [[3당 합당]],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거쳐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는데, 그 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려고 한 것. 비록 박종운이 이부영 의원의 천거를 받아 민정계 인사를 제치고 공천을 받았다지만, 박종철이 왜 죽었는지, 한나라당의 주류가 누구인지를 아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박종운은 16대~18대 총선에서 내리 3연패를 하며 '오정의 낙선왕'이라는 야유와 함께 정계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