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힘들고 절망에 빠졌을 때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

1948년 가난한 어촌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가발공장, 식당 등에서 일하였고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단돈 100 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식모살이를 떠난 여자.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일하며 대학을 다녔고, 76년 미 육군에 들어가 소령으로 예편, 50세가 넘은 나이에 하버드 박사과정에 다니는 여자, 서진규. 그녀는‘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읽어라)에서‘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다.

수차례 그래미상과 MTV상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몇 개씩 수상한 미국의 백인 랩 가수 에미넴(Eminem). 그 역시 쓰레기 더미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생후 5개월 만에 아버지는 도망갔고 마약중독자인 어머니는 완전 떠돌이였다. 에미넴의 삶을 그린 영화 8 mile을 보면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동창생과 동거를 하면서 그 동창생이 오럴 섹스를 안 해준다고 아들에게 호소하는 골 때리는 장면도 나오고 자기 애인이 친구와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연히 그의 노래에는 어머니나 애인에게 쌍욕을 퍼붓는 내용이 나오며 대부분의 가사는 아주 반항적이고 폭력적이고 외설적이며 욕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2000년 미국에서‘공공의 적’으로 꼽힐 정도였다. (50이 가까운 나이인 내가 에미넴의 CD를 싱글 포함 6 장이나 갖고 있으며 아주 즐겨 듣는다는 것을 알면 아마도 쇼크 먹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미국의 어느 학교에서 총기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이 에미넴의 앨범을 즐겨 들었었음을 기자들이 지적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심히 유감이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도 미운 사람이나 짜증나는 사회를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없는가? 나는 학창시절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을 죽이고만 싶었다. 집에 돌아 와 자기 방의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수는 심정을 이해하는가?’

나는 이해한다. 나는 주먹으로 피가 나오도록 방바닥을 치고 거울을 깨부순 적도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이발소에는 대부분 푸쉬킨의 시가 걸려 있었다.‘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나는 이 시가 참 싫었다. 내 삶은 수제비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슬퍼하지도 말고 노하지도 말라니. 희망은 안 보이는데 견뎌내라니. 세상은 이른바 배웠다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는데 기쁨의 날이 올 것을 믿으라니. 돈 봉투를 안 가져온다고 나를 책망한 담임은 어느 날 모범 교사로 칭송을 받고(나중에 교장까지 되었다), 나는 자원입대 하였는데 멀쩡한 부잣집 친구들은 징집 면제 되고, 그런데 지나가는 시간이 훗날 소중하게 된다니 그것을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나는 세상에 대한 나의 분노를 폭파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처럼 세상이 뒤집혀질 전쟁을 기다렸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나 세상을 욕하고 가래침을 줄곧 뱉었지만 정작 나 자신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 눈이 시뻘겋게 일확천금만을 노리며 한탕 할 기회만 노렸고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꿈틀거리기만 했다. 카프카의‘변신’의 벌레처럼 나는 먹고 싸고 먹고 싸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었으며 내일은 다시 어제였다. 조그마한 차이도 없었다. 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었다. 나는 혐오스러운 나의 삶이 너무나도 한심하였고 끝내는 저주스러웠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분노하였다. 내가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혐오감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5월의 찬란한 햇살 밑에서 향긋한 꽃내음을 그대로 들이 마시며 어깨를 펴며 살고 싶었다.

당신은 어떠한가? 내가 수집하는 것 중에 모형 자전거가 있다. 이미 50개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뒷바퀴를 돌리는 것은 당신의 발이지만 앞바퀴를 돌려 방향을 잡는 것은 당신의 손이며 눈이고 의지이며 정신이다. 당신의 발이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움직여는 주지만 정작 당신의 손은 호주머니 속에 깊이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정작 당신의 눈은 당신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지 않고 옆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오토바이들과 스포츠카만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지도 모른다. 때문에 비록 열심히 페달을 밟고는 있지만 당신이 탄 자전거는 제 자리를 맴돌 뿐이다.

만일 당신이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것들에 현혹되어 채팅, 게임, 공짜 사이트, 복권, 유명 브랜드 상품, TV, 술, 도박, 경마 등 일확천금과 한탕주의의 망상에만 몽롱하게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이 바로 그렇게 제 자리를 맴도는 사람이다. 그렇게 삶에 질질 끌려 다니며 제 자리를 맴도는 사람들이여. 이제는 그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아라. 비겁하게 외면하지 말라. 그 삶이 자랑스러운가? 이제는 그 삶에 대해 분노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파충류와 포유류의 차이 중 하나는 파충류는 본질적으로 화를 내거나 기쁨을 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뇌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변연계가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악어 쇼에서 악어를 때려도 악어가 화를 내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신의 삶이 분노할 대상임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의 뇌는 썩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어 버려라. 하지만 이제라도 삶이 당신을 속인다고 생각되면 그 삶을 던져 버려라. 내동댕이쳐라. 삶은 한번 뿐이다. 삶에 비굴하게 질질 끌려가지 마라. 명심해라. 당신이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이 세상이 아니다. 현재의 당신의 삶에 먼저 슬퍼하고 분노하면서‘분노’라고 말하라(Say No!). 그리고 당신의 삶을 스스로 끌고 나가라. 당신이 주인이다.

돈 독이 들어야 부자가 되는 줄 아는가? 투자기법을 몰라서 부자가 못 되는 줄 아는가? 절대 아니다. 일확천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꿈 깨라. 쇠고랑을 찰 기회만 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광고만 보아도 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여. 메일만 보내면 수억원을 벌 수 있다고 떠드는 자들이여. 편안하게 빨리 돈 벌고 싶어서 애를 태우는 자들이여. 평생 가난의 괴로운 숯불이 이마 위에 올려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는 그대들이 한시라도 빨리 그 허황된 몽상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 피와 땀과 눈물과 시간 없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물만 부으면 되는 컵 라면 같은 순간적인 인스턴트 재테크 지식만 찾는다. 마치 자기가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어떤 투자 기법을 모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이재에 밝지 못한 때문으로 치부해 버린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당신 생각대로라면 이른 바 재테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모두 부자이어야 하는데 그들의 평균 재산은 다른 직장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나에게서 실전 투자기법을 배우면 돈을 더 벌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태도부터 바로 세우지 않는 한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당신을 한심한 사람으로 매도하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다. 자기 삶의 노예가 되어 자기 생활과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돈의 주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현재의 삶이 절망스럽고 괴롭고 암흑에 싸여 있는 것 같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이제 분노하라. 분노를 느끼는 사람만이 닫힌 문을 세게 쾅쾅쾅 두드릴 수 있다. 용수철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당신의 삶을 이 거친 세상에서 우뚝 홀로 세울 수 있도록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피튀기듯 노력하라. 그리고 이제는 자전거 손잡이를 제대로 잡고 정면을 바라보고 페달을 밟아라. 그렇게 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게 되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돈이 당신의 노예가 되어 당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인생역전은 당신 스스로 현재의 삶에 분노하여 그 삶을 뒤집어 버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수백억짜리 복권에 이번에는 내가 당첨될 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지우개' (송순태)

잘못 써내려온 문장이 있듯이 잘못 살아온 세월도 있다 바닷가에 앉아서 수평을 보고 있으면 땅에서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겠다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이 아니고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이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이 바다에 이르면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에 실려 매듭이란 매듭은 다 풀어지고 멀리 수평선 끝에서 평안해지고 마는구나 잘못 쓴 문장이 있듯이 다시 출발하고 싶은 세월도 있다

천재 앞에서 주눅 들지 말라

가스보일러에 사용되는 환풍기부품 등을 생산하는 종업원 50여명의 중소업체 파워텍. 이 회사가 2000년 1월 리타워인베스트먼트사에 경영권이 넘어갔다. 리타워인베스트먼트사의 회장은 불과 31살인 미국계 한인 최유신 회장. 미국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자딘플레밍 증권사에서 기업 인수합병(M&A) 업무를 담당하다 스미스바니은행 한국지사를 거쳤으며 98년 하버드 후배들을 긁어모아 회사를 설립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경제계 유명인사이다. 최 회장은 파워텍의 경영권을 넘겨받자마자 그 회사를 아시아 지역 인터넷 벤처회사들을 인수합병하는 투자회사 리타워텍으로 탈바꿈한다고 발표했고 리타워텍은 현금 투자는 거의 없이 주식 스왑을 통해 여러 기업들을 인수하면서 지주회사로 변신한다.

그리고, 리타워텍은 역사상 최대의 외자유치라고 하는 13억 5,000만 달러의 외자유치 계획을 발표한다. 2000년 7월 21일 13억5천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조5천억원)가 해외에서 들어왔지만 그 돈은 불과 3시간 만에 다시 해외로 빠져 나갔다. 그 자금은 하루0.3% 이자를 주기로 하고 3시간 빌린 초단기 외화자금이었다. 어쨌든 리타워텍의 주가는 2000년 1월4일 2,415원에서 35일 연속 상한가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5월18일에는 36만2,000원에 달하게 된다. 누군가 떼돈을 긁어모았다는 말이다. 주가는 얼마 후 곤두박질치고 2001년 금감원에서 검찰에 수사의뢰하고 어쩌고 하였지만 주목할 만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은 리타워텍에 대한 신문기사들을 정리한 것이다. 1) 나는 리타워텍 관련 기사를 보면서“참 대단한 천재들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죽어다 깨나도 1조 5천억 원에 달하는 외화를 3시간 빌리는 방법은 생각하지 못한다. 게다가 사전에 리타워텍은 국내 최대의 법무법인인 김&장 법률사무소를 통해 재경부에 그러한 해외투자 계획을 설명하며(내 짐작이지만 3시간 동안의 투자라는 사실은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법 여부를 묻는 공문을 보냈었고 재경부 관계자는“검토 결과 하자가 없어 적법하다는 회신을 보냈다”고 한다. 치밀하다! 천재들이다! 물론 상투를 쥔 개미들은 엄청난 피박을 썼다. 불쌍한 개미들…. (나는? 도대체가 수상쩍어서 리타워텍 주식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관련된 놈들을 아주 좆같은 18새끼들로 본다).

경향신문 2000년 2월 22일자에는‘사이버 투자왕, 대박 박정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5살 때 10만 자리까지 암산해‘수학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생때 아파트 평당 가격을 계산했다. 3수를 하던 때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값이 평당 1천만 원까지 폭등하자 부모님에게 아파트를 빨리 팔아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2년 뒤에 평당6백만으로 하락했고 IMF가 닥치자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6백만 원에 처분한 부모님은 아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2,191%, 2,057%. 99년 4월15일 1, 2회 한화증권 주최 사이버 투자대회 대학부문에서 올린 그의 경이적인 수익률이다. 1천만 원의 종자돈으로 사이버 매매를 통해 실전투자를 해 2억여 원을, 6백60만원을 투자해 1억4천여만 원을 벌었다. 지난 1월 증권 사이트 세르파 주최 밀레니엄 증권 수익률 게임에서는 1천만원 모의투자를 해 1,823%의 수익률을 올렸다.

대학생이 된 뒤 수학강사 자리를 얻어 1년 만에 1천만원의‘시드 머니’를 마련하였을 때 공모주를 중심으로 투자했다. 1천만원은 3년 만에 무려 1억5천만원으로 불어났다. 그런데 IMF가 닥쳤다. 결국 98년 1월에 2천만원으로 곤두박질쳤다. 1년여의 시간이 흐르자 베팅을 하기로 결심하고 2천만원 시드머니 중 1천만원을 투자했다. 한화증권에서 실시한 투자대회였다. 3개 대회에서 받은 상금만도 2억5천만원. 주식에 필요한 공부는 하루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경제신문을 즐겨봤지만 TV는 거의 보지 않았다. 지금도 신문의 경제면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본다. 그의 취미는“주식투자”. 일이 아니라 취미로 주식투자를 즐기는 것이 남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는‘원천’이라고 한다. 당신은 이런 기사를 보면 무엇을 느끼는가? 나는“이 친구, 정말 돈 버는 천재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물론 나는 그가 계속해서 그렇게 돈을 벌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노력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발명왕 에디슨이“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으며 괴테는“천재라는 것은 노력의 발명”이라고 하였음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범재들도 죽어라고 주식에 대해 공부하고 노력하면 1년에 2000% 가량의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어렸을 때는 정말 노력만 하면 그렇게 천재 비슷하게 될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니 그런 말들은 주로“이미 1%의 영감을 타고 난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고 그저 천재가 둔재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당신들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보내는 격려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국어사전에서 조차 천재를“타고난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러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할 뿐“노력의 결과”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았는가? 죽도록 성실하게 노력하지만 끝내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작곡하지 못하는 살리에르. 그리고 망나니처럼 생활하면서도 타고난 재능으로 인해 감동적인 음악을 아주 손쉽게 만들어내는 모차르트. 천재 모차르트 앞에서 살리에르가 느끼는 열등감과 시기심. 나 역시 천재들을 보면 언제나 열등감과 시기심을 느낀다. 영화 굿 윌 헌팅을 보았는가? 무지무지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 최고의 대학에 들어 간 학생들과 교수. 반대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청소부이지만 타고난 천재성 때문에 공부를 안 해도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윌 헌팅. 학생들과 교수는 그 천재 청소부에게 무엇을 느꼈을까? 시기심, 열등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좌절도 느끼지 않았을까.

모파상의 스승 플로베르는“천재, 칭찬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일종의 정신병자이다”라고 혹평했지만 누가 뭐래도 천재는 우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과학자들은 천재아동 200명과 보통 어린이의 DNA를 분석해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고 천재성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찾아냈다고까지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유전자가 없다는 말인가.

천재 같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나는 나, 너는 너’라고 생각하며 살 수도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시기심도 있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기도 한다. 특히 천재가 저 먼 나라에 있다면 그저 찬사나 보낼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 보면 우리는 자신이 보잘 것 없는 듯한 느낌에 빠지고 만다.‘왜 나는 이 사람처럼 되지 못하고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할까’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그래서 공상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천재가 되고 은행도 털고 슈퍼맨도 되고 억만장자도 되고 투명인간도 되어 이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그 돈으로 뭘 하겠다는 상상의 나래는 끝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공상은 즐겁다.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그 공상에서 깨어나면 현실이 싫어진다. 내가 그랬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라. 돈은“1%의 영감을 타고난 천재”만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카드 다섯 장을 쥐고 하는 포커판에서 나올 수 있는 카드패에는 2,598,960개 종류가 있다고 한다. 즉 최고의 카드패를 쥘 사람은 약 260만명 중의 한명이다. 하지만 포커에서 그런 카드패를 갖고 있지 않아도 당신은 이길 수 있다. 그저 포커 게임에 참석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좋은 패를 갖고 있으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카드를 받은 잘난 사람들은 무시해라. 그들의 포커판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몰려 있다.

핵심은 천재들의 이야기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의 게임이지 당신보다 크게 잘난 사람들과의 게임이 아니다. 예컨대 당신이 보통 사람이라면 하버드를 수석으로 나온 사람과 경쟁하게 될 까닭은 없지 않는가. 오히려 그 사람 주변에 더 무서운 경쟁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른바 공부 잘하고 머리 좋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학교나 연구소 혹은 법조계나 의료계 또는 유명 기업들에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사실이냐. 서울대 이공계 수석 입학생들의 80% 이상은 나중에 교수가 돼 있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이 역시 범재들에게는 너무나도 다행한 일 아닌가! 당신이 보통 사람이라면 교수나 의사 혹은 변호사와 경쟁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자, 부자가 되는데는 신이 내린 어떤 재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학벌도, 배경도, 자격증도 큰 도움이 안 된다. 부자가 되는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결국 그것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의 게임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과의 게임이기에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가 속한 분야에서 다른 보통 사람들과 경쟁하여 이기면 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이 놀 때 놀지 말고 그들이 잠잘 때 잠을 덜 자고 그들이 쓸 때 덜 씀으로서 목돈을 준비하고 기회를 찾으면 된다.

게다가 그렇게 노력하는 자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정신 차리고 내 말을 새겨들어라. 보통 사람들은 학벌이나 배경이나 자본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학벌이나 배경, 자본 등이 없는 보통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그런 것이 없으므로 노력하여 보았자 무의미하다고 믿고 아예 노력을 포기하고 만다. 현재의 위치에서 미래를 미리 계산하여 보고 미리 포기하는 그런 사람들이 당신 주변 사람들이며 그들은 그저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연예인이나 정치인, 스포츠 선수들, 컴퓨터 게임, 채팅, 명품 브랜드, 경마 등에 무지 관심이 많다. 당신이 하는 게임은 바로 그런 사람들과 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이것 역시 당신에게는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기쁘고 다행한 사실이라는 것을.

이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당신의 적군이 더 이상 싸울 생각을 갖지 않고 총을 내려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적들과 싸울 때는 총도 필요 없고 그저 활이나 창 만 있어도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거창한 그 무엇도, 번쩍번쩍한 학벌도 대통령 친척과 친하게 지내는 배경도, 많은 자본도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빨리 깨달아라.

‘미래의 결단’,‘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미래학의 거두 피터 드러커 역시 높은 성과를 올리는 생산적인 사람, 끊임없이 혁신을 꾀하면서 계속 발전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중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지속적인 관리와 노력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

앤드류 매터스는‘마음가는 대로 해라’(읽어라)에서 이렇게 말한다.‘새벽에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사람들도 사귀면서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인생에서 좋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원번역이 어색하여서 내가 고쳤다). 나는 올빼미 체질이어서 늦게 자기에 새벽에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을 믿는다. 부자가 되는데 있어서의 경쟁자는 천재가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의지라고 하는 이 지극히 간단한 사실이 독자들 마음속에 각인되기를 바란다.

추신; 엄청난 부자들의 신화 같은 이야기에 초라해 할 필요도 없다. 특히 아무 아무개 경영자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 총액이 얼마라는 등의 기사는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 회사의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일정 수의 주식은 계속 보유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팔아버린다면 경영권을 잃게 된다. 즉 환전성이 약하다. 게다가 주식가격이 정찰가로 매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비상장 회사 주식인 경우에는 그 가치를 자기 마음대로 부풀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미공개 회사의 주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치자. 그리고 이 회사의 미래 가치를 5천억원이 된다고 뻥을 튀기면 내 재산은 졸지에 수천억원도 되고 1조원도 되게 된다. 그러나 미래가치라는 것은 순전히 말 만들기 나름이다. 시장에서 평가 받지 않은 주식의 가치는 아무도 모르며 그것마저도 현금화되기 전 까지는 실제 총액을 모른다.

스트레스의 뿌리를 없애라

미국 잡지‘직업 등급 편람’에 의하면 미국의 2000년도 인기 직업 순위에서 대통령이 167위로 나타났다.“이는 대통령이 과다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잡지는 매년 노동부와 통상단체들의 자료와 전화조사 등을 토대로 250개 직업의 순위를 매기고 있다. 인기 직업순위 1위는 1999년 17위였던 전문 재산관리자가 차지했으며 가장 호감도가 낮은 직업은 어부인 것으로 조사됐다. 99년 1위였던 컴퓨터 웹 마스터는 2위로 떨어졌다. 교사는 119위, 경찰관은 200위로 나타났는데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여건이 주원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직업이 있을까? 암 치료 전문 의사들은 암정복을 위한 필수 요소들 중의 하나로서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조언한다. 그들은 스트레스가 인체의 면역력을 떨어뜨리며, 스트레스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욕망을 줄이라고 충고한다. 또한 화를 내면 우리 몸의 면역기능을 저하시키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지만 반면에 웃음은 우리 몸의 방어능력인 면역력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에 한번은 크게 웃으라는 것이 그들의 충고이다. 그렇다면 스트레스 해소 방안을 제시하여 준다는 정신과 의사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들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 같다.

이미 독자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도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실패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주말에는 교외로 나가 신선한 자연을 벗하라. 일에 쫓기지 말라. 오늘 못한다고 내일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란 없다. 긴장을 풀고 살아라. 경쟁심을 버려라. 그들은 그들이고 당신은 당신이다. 실력과 능력이 다가 아니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건강을 생각하며 운동을 하라. 운동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자주 친구들과 만나 웃고 떠들며 놀아라. 그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느긋하게 천천히 살아라. 그것이 스트레스를 피하는 길이다.”

독일 풀다의 한 대학에서 건강학을 가르치고 있는 페터 악스트 교수 역시 내과의사인 딸과 함께 쓴‘게으름의 즐거움에 관해’라는 책에서“마라톤을 하는 대신 해먹(달아맨 그물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거나, 스쿼시를 하는 대신 낮잠을 자는 사람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직업상 받게 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장수하는 비결을 목표를 정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너무 일찍 일어나면 온종일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며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런 조언에 충실히 따르며 살아간다면 장담 하건 데 몇 년 후에 건강한 신체를 갖게 될 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하고 있는 일은 망한지 오래 이거나 아니면 직장에서 이미 해고되어 구직 이력서를 서너 통 언제나 준비하여 갖고 다니는 몸 튼튼한 실업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건강이 최고라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건강을 지키면 모든 것을 다 갖게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는가.

자. 문제의 핵심을 살펴보자. 왜 스트레스가 생기는가? 어떤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가?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한다. 스트레스는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다. 왜 문제가 안 풀리는 것일까? 푸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 모르는가? 책도 안 읽고 공부도 안 하기 때문이다. 왜 공부를 스스로 안 하는가? 게으르기 때문이며 스스로의 판단과 생각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최고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 달에 책 한 권도 안보고 공부는 학원이나 학교에 가야만 하는 걸로 믿는다. 그러면서도 놀 것은 다 찾아다니며 논다. 그런 주제에 자기는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하는데 주변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그러면서도 수입이 적다고 투덜투덜 댄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문제는 그대로 남겨둔 채 그 문제로 인하여 생긴 스트레스만을 풀어버리려고 한다면 원인은 여전히 남아 있는 셈 아닌가. 휴식을 충분히 갖고 쉬라고? 웃으라고? 한 달을 바닷가 해변에서 뒹굴어 보아라. 백날을 하하 호호 웃어보아라. 문제가 해결되는가? 웃기는 소리들 그만 해라. 기억하라. 제초제를 뿌리는 이유는 뿌리를 죽이기 위함이다. 뿌리를 살려두는 한 잡초는 다시 살아난다. 스트레스를 없애는 가장 정확한 방법 역시 스트레스를 주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이다. 장담하건대 그 모든 원인은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지 모르는 당신의 무지 그 자체이다. 즉 외부적 상황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 상황을 어떻게 해야 헤쳐 나가는지를 모르고 있는 당신의 두뇌 속 무지 때문에 생긴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무지함의 뿌리는 바로 게으름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한답시고 빈 맥주병을 쌓아가지 말고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라. 절대 회피하지 말아라. 책을 읽고 방법론을 찾아내라. 그게 바로 스트레스를 없애는 제초제이다.

친구들과 상의하는 짓도 그만두어라. 당신이나 친구들이나 스트레스를 받기는 마찬가지이며 그저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답답함에 대한 약간의 위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 아닌가. (여기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세이노는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시간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으니까 스트레스도 해결 할 수 있겠지만 자기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지 않느냐.”

나의 대답:“아마도 당신은 남이 시킨 일을 하는 이상은 스트레스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왕년에 누군 남이 시킨 일을 안 해 보았는줄 아는가. 내가 당신하고 다른 점은 나는 누가 시킨 일이건 아니건 간에 일을 해결할 능력 배양에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능력 배양은 언제나 일과 후에 있었으며 노는 날이라곤 거의 없이 30대를 보냈었다. 아마도 당신은 노는 날들을 악착같이 다 찾아 먹어 왔을 것이다.”)

실패하면 제로점으로 내려가라

왜 큰 부자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가난하였던 과거를 갖고 있을까? 어째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자가 된 사람들 보다는 하류층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가난을 일찍 경험한 사람들은 가난하였던 생활수준이 출발점이었기에 그곳으로 언제라도“되돌아가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잘못 되어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다 날리는 실패를 당하게 되어도 제로 점으로“되돌아가”재출발을 할 줄 안다. 수없이 많은 부자들이 사업이나 투자에서 실패하거나 홍수나 화재 등으로 전 재산을 날렸다가도 재기에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제로 점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제로 점에서 출발하였던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서 제로 점으로 가는 것은“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여야 하는 미지의 불안한 공포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실패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실패 자체를 너무 두려워하다 보니 되는 일도 별로 없게 된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말 이전 까지는 넉넉한 환경에서 살았으나 그 이후에는 허름한 적산가옥(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살았던 집)의 2층 단칸방에서 가족 7명이 살았다. 고교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가마니가 문 가리개 역할을 하는 재래식 변소를 주인집 식구들과 같이 사용하는 그런 곳에서 월세로 전 가족이 살았다. 그 변소는 여름에는 파리 구데기들이 득실대는 모습이 적나라하였고 노크라는 것 대신에 인기척을 내야 하였던 그런 곳이었다. 집주인은 시장에서 순대를 파는 부부였는데 가게를 갖고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순대를 작은 손수레에 끌고 다니며 파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 주인이 사는 집이라는 것도 높이 1미터 수준의 낮은 판잣집이었으며 매일 순대 삶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높이가 그렇게 낮은 이유는 높이 1미터 미만은 건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철거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곳에서 벌레처럼 살았다.

그 다음에 서울역 앞 양동의 쪽방 등 몇몇 곳을 더 거치게 되지만 가정집 차고에서도 살았었다. 나는 몇 년을 그런 곳들에서 혼자 살았고 주거 환경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차고 한 칸에 불과한 좁은 공간이었지만 예전 보다는 훨씬 더 나아진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보유 자금을 불리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가 28세에 집을 샀지만 1년 후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고 빚은 약 3천만원(당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가까이 있었다. 나는 제로 점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나는 주로 번역 일에서 수입을 얻었는데 번역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먹고 잤던 것이다.

부자로 살고 있는 지금도 내가 만의 하나 무슨 잘못 때문에 재산을 다 날리게 되어 빈털터리가 된다면(솔직히 그럴 리는 없다. 나는 비올 때를 대비하여 우산을 서너 개는 반드시 준비하기 때문이다), 즉시 나는 가족을 이끌고 제로 점으로 내려갈 것이다. 그곳은 판잣집일 수도 있고, 남의 집 차고 일수도 있으며, 쓰러져 가는 무허가 비닐하우스 일 수도 있다. 나의 아내는 내가 빈털터리가 되어 망해버렸는데도 넥타이를 계속 걸치고 양복을 입고 다니면서 다단계 판매나 보험영업 같은 것을 하며 품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내는 내가 즉시 작업복을 입고 시장에서 노점이라도 할 사람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믿는다. 실제로도 그렇다. 나는 언제라도 제로 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결혼하기 전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나는 틀림없이 부자로 산다. 돈의 생리와 부자가 되는 비결을 알기 때문이다.”아내는 그 당시 나에게 빚이 아파트 한 채 값인 3천만원 정도 있었기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는 순전히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시티 보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와 결혼하였다.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 이미 나는 자가용 기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나는 틀림없이 앞으로 더더욱 부자로 산다. 나는 딸들에게도 그 비결을 알려주고 싶다. 그 비결 중 하나는 낮은 곳에서 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들이 중학교 수준이 되면 아빠가 갑자기 망했다고 말하고 거짓으로 재산을 몽땅 차압당하는 것으로 연극을 꾸미자. 그리고는 판잣집으로 이사 가서 단칸방 생활을 하자. 너는 파출부를 하는 것으로 하고 나는 뭐 길거리에서 노점을 하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모르겠다. 우리 둘은 허름한 옷을 입고 매일 아침 판잣집에서 나와 숨겨놓은 진짜 집에 가서 낮에 있다가 저녁에는 다시 애들이 있는 판잣집으로 돌아가자. 물론 애들에게는 돈이 전혀 없는 듯 처신하고 등록금은 일부러 늦게 주자. 맛있는 것이 먹고 싶으면 우리끼리 몰래 밖에서 외식하고 들어가고 딸들에게는 수제비나 먹이자. 봉투 붙이는 일 같은 것도 가져와 딸들에게 시키자.”이러한 계획은 아내의 반대로 인하여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하였고(아내는 내가 농담하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그 대신 딸들에게 이 세상에서 대가를 얻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에서의 삶을 체험하여야 나중에 경제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나는 지금도 믿는다.

중산층이나 상류층에서 태어나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실직이나 투자 실패 등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되면 대부분 빚을 내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살았던 생활수준 보다 현저하게 낮은 곳으로는 내려가려고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예를 들어 2억원 대의 30평형 자기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이 주식투자나 사업에 실패하여 빚이 1억 생기게 되면 그 집을 팔아 빚을 갚고 난 1억원을 갖고 전세를 구하되 가능하면 비슷한 규모의 집을 구하려고 하며 이때 전세금이 모자라면 또다시 빚을 얻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집은 그대로 놔두고 빚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니 빚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버는 족족 이자에 원금을 갚아나가니 사는 재미도 느끼지 못한다. 왜 그들은 생활수준을 저 낮은 곳으로 던져 버리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내 주변에 9천만원의 전세를 살면서 빚은 1억원을 지고 있는 30대 중반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연봉 2천만원대의 봉급생활자였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진퇴양난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권유한 방법은 있는 것을 다 처분하여 빚부터 갚고 달동네 월셋방 하나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그는“그런 판잣집에서 어떻게 애들하고 산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였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웃기는 소리하지 말아라. 너는 지금 연봉의 절반 이상을 이자를 지불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평생 빚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알 것이다. 너에게 보이는 해결책은 일확천금이기에 복권이나 주식 같은 것에 눈이 시뻘개지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요행수를 바라거나 무엇인가에 쫓기며 하는 투자는 언제나 허무하게 끝나기 마련이다. 생활비를 극도로 줄이고 자신의 몸값을 비싸게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밤에 포장마차라도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다. 어릴 때 가난을 맛보는 것도 행운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하기 싫다면 개인파산을 신청하던지 불법적으로 콩팥 같은 신체의 일부라도 팔아 빚을 갚던지 해라.”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너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이야 망하건 말건 개의치 않는다면 외국으로 온 가족이 다 야간도주하는 방법도 있다. 아내와 법적으로 이혼하면서 전세집은 넘겨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월급 차압이 들어올 것이므로 직장은 그만두고 세금 안내는 다른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어 몰래 가족에게 전달해라.”“외국에서 살 자신은 없고 이혼은 아내가 반대할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글쎄다. 술 한 방울 먹지 말고 아주 예리한 면도칼 하나를 사고 가족사진을 앞에 놓아라. 그리고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거울 앞에 서서 네 목에 흐르는 핏줄 바로 위에 칼을 갖다 대라. 너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네 가족은 너를 평생 패배자로, 도망자로 기억할 것이다. 그 점을 명심해라. 그래도 죽고 싶다면 돼져 버려라. 그러나 죽은 뒤 그런 식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면 죽을 각오로 처음부터 빈손으로 다시 시작해라. 판잣집으로 가서 월세살이를 하란 말이다. 5년만 지나면 모두가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왜 재산을 갖고 이민을 간 사람들 보다는 빈털터리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그 낯선 땅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더 많은가. 밑바탕에서 아무 것도 없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낮은 생활수준으로 살아가며 돈을 모았기 때문이다. 제로 점에서 살게 되면 모든 것이 플러스 희망으로 쌓여 만 간다. 돈이 쌓이고 희망이 쌓여 간다. 빚이 있는데도 삶의 질과 품위를 유지하려고 들면 그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돈은 쌓이지 않고 희망은 갉아 먹힌다. 마이너스의 희망뿐이다. 그것이 절망이다.

나는 외국인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할 기회가 과거에 종종 있었는데 강의 중에 스크래치 scratch 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였다.“긁어서 내는 흠집, 긁다, 흠집을 내다”라는 뜻인데“지운다”는 뜻도 있다. 운동경기에서 땅에다 선을 그으면 출발선이 되기 때문에“출발선, 출발점”이라는 뜻도 있으며 scratch along 은“근근이 살아가다”, from scratch 는“출발점에서, 맨 처음부터, 무(無)에서”라는 의미이며, scratch up 은“돈 같은 것을 긁어모으다, 푼푼이 저축하다”는 뜻이다. 미국속어에서는“돈”이라는 뜻도 있다.

내가 말한다. 경제적으로 실패하였다면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그 체면에“흠집을 내라”(scratch). 출발점을 저 낮은 곳에 다시 “그어라”(scratch). 당신이 놓치려고 하지 않는 생활수준이라는 것을“지워버리고”(scratch) 새로운“출발점”(scratch)에서“무에서”(from scratch)“근근이 살아가면서”(scratch along)“돈을 모아라”(scratch up). 그러면“돈”(scratch)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로부터 탈출하는 비결이다. 스크래치하라!

미래를 미리 계산하지 마라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껭은‘자살론’에서 자살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에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외감이나 우울증으로 하게 되는 자살(이기적 자살), 자신이 속한 집단에 지나치게 융합 결속되어 집단을 위해 희생적으로 하는 자살(이타적 자살), 개인이 사회에 대한 적응이 갑자기 차단, 와해되면서 삶의 기준을 상실할 때 발생하는 자살(아노미anomy 자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살은 아마도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 자살이 혼합된 것인 듯싶다.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서두로 꺼낸 것은 내가 20대 초에 그런 경험이 세 번 있기 때문이다. 약을 먹기도 했지만 며칠 후 깨어난 적도 있고 손목에 면도칼을 깊게 긋기도 했는데 깨어보니 병원 응급실이었고 그 덕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정신병원에 강제로 보내지기도 했다(혹시라도 세이노 행세를 하며 사기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왼쪽 팔목에 길이 6 cm, 4 cm 짜리 칼자국 두개가 나란히 있다. 면도칼로 그었더니 피가 졸졸 흘러 다시 팍 그었기에 칼자국이 2개가 되었다. 그걸 확인하면 된다. ᄒᄒ ) 우울증에 걸렸던 것 아니냐고? 그랬던 것 같다. 내가 극단적으로 우울해진 사건은 군 제대 후 압구정동에서 일어났다. 우연히 그곳을 부잣집 여자 친구와 지나가다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결혼 후 어떤 곳에서 살고 싶으냐고 말이다. 그녀의 대답은‘얼마 전 결혼 한 막내 언니가 20몇 평에서 사는데 좀 좁게 느껴지므로 자기는 30평 정도가 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동네 아파트 가격을 알아보았더니 30평형은 커녕 가장 작다는 20몇 평형 아파트의 전세조차도 나로서는 평생 못 가질 것이었다. 남산 꼭대기에서 바라다 볼 때 수없이 널려 있는 그 아파트들 중 정말 단 하나도 내 것이 된다는 것은 정말 영원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게 벌써 근 30년 전 이야기이다.

십 몇 년 전 음향기기 사업을 했을 때,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아 출신의 한 젊은 직원을 고층 건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 밤거리를 보여 주면서,‘저기 저 성냥갑 같은 수많은 아파트들 중 네가 들어가 쉴 곳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과거에 그랬듯이 그 역시 같은 생각에 절망하고 있었다(어쩌면 당신도 강남의 수많은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절망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내 밑에서 3년 정도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웠고, 그 뒤 독립하여 줄곧 용산에서 1인 비즈니스를 하여 왔는데 5, 6년 전 결혼도 하고 아파트도 장만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아직도 용산 전자상가에 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건물 옥상에서 수많은 아파트 불빛들을 바라보며 바로 그 직원에게 내가 한 것이었다.

사람들은‘하면된다’고 말하였지만 나는 도대체 할 것이 없었다. 뭘 하면 된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군 제대 후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며 대학생도 아니었고 홀로 세상에 던져진 가난한 청년에게‘하면된다’는 말은 정말 사기나 다름없었다. 아침 햇살을 가슴 벅차게 안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나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는 지긋지긋한 가난이었다. 라면 살 돈도 없어서 라면 스프만을 얻어다가 양은 냄비에 물을 붓고 연탄불 위에 끓인 뒤 거기에 다 식어 빠진 밥을 김치도 없이 계속 먹어 보아라. 무슨 희망이 있다고 살맛이 나겠는가.

그 시절의 나에게“하면 되는”것이라고는 뜬 구름 잡는 책들을 책방에서 선 채로 다리 아프도록 읽는 것과 마스터베이션뿐이었다. 그나마 마스터베이션이라도 되었으니 다행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발기가 안 되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결국 절망감, 고독감, 외로움, 열등감, 상황도피, 삶의 기준 상실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살을 생각하였고 그것이 거듭 실패하자“이 좆같은 세상에서 이왕에 살아야 한다면, 내 팔목에서 쏟아진 피보다 더 진하게 살아보자”고 결심한다. 그리고 은연중에“피보다 진하게 살자”가 나의 좌우명 비슷하게 자리 잡았다.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걸려 자살충동을 느끼면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중증의 우울증 환자인 경우 머리에 강한 전기 쇼크를 주어 잠시 죽였다가 실험실 개구리 뒷다리처럼 온 몸에 발작이 일어나면서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하면 다시 살려내는 그런 치료법이 종종 사용되었다(그런 장면을 본 나는 정신과 의사 앞에서는 명랑한 척 하여 풀려났다.ᄏᄏ).

23살의 어느 우울한 봄날이었다. 다시 봄이 왔을 때 나는 남의 집 차고에서 살면서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해서 미군 부대 물건 판매 등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그리고 28살의 어느 여름날 나는 허름하지만 마당까지 있는 집과 자가용을 처음 샀다. 융자를 낀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나 불가능하게 여겼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하지만 1년 후 나는 그 재산을 사업상의 이유가 아닌 개인적인 이유로 몽땅 날렸고 빚을 졌지만 3년 후 다시 일어섰다.)

살다 보면, 해도 해도 아무것도 안될 것 같이 보일 때가 있다. 어떠한 대안도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때가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실망, 좌절이 절망 속에서 계속 쌓이면 자살의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경우 자살은 함부로 저지르는 의미가 없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이 처한 고통이나 위기상황, 상실감 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자살이 그런 탈출구였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떨어지고 있으므로 하늘을 향해 날아 볼 수는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떨어지던 중 비쩍 마른 두 팔로 온 힘을 향해 세상 속으로 날갯짓을 시작하였을 뿐이다.“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말을 그래서 나는 좋아한다. 추락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날갯짓을 할 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절망의 골짜기에는 밑바닥이 없다. 아무리 깊이 떨어져도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절망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를 파괴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일 뿐이다.

마약 중독자들의 일상을 그린 영화‘트레인스포팅’에서 주인공 마크 렌튼은 이렇게 말한다.“삶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라. 미래를 선택하라. 가족을 선택하라. 빌어먹게 큰 텔레비전을 선택하라. 세탁기, 자동차, CD 플레이어, 전동식 깡통 따개를 골라라. DIY제품을 고르고,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 회개하는 삶을 선택하라, 빌어먹을…. 하지만, 내가 왜 그런 것을 원해야 하지?(But why would I want to do a thing like that?)”렌튼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비웃는 듯 보이지만 그의 독백 속에는 학벌이나 돈, 능력도 없으므로 평범하게 살래야 살 수도 없지 않느냐는 절망이 근저에 깔려있다. 그는 대안으로 마약을 선택하였을 뿐이다.‘트레인스포팅’은 영국에서 기차가 처음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생긴 말로, 사람들이 기차역 플랫폼에 모여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번호를 맞추는 게임을 뜻한다. 이 영화의 극작가 존 호지는“이런 게임을 하는 사람들, 즉 트레인스포터는 혼돈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행동 양태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일 수 있으며 이는 영국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현재를 사는 모든 젊은이들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결국‘트레인스포팅’은, 삶은 우리에게 달려오지만 우리는 삶의 번호를 알지 못하며 다만 번호를 맞추는 게임을 할 뿐이라는 의미를 던져 준다.

우리는 왜 절망하는 것일까? 미래의 상황을 현재의 처지에 비추어 미리 계산하기 때문이다. 지금 일류대를 못 다닌다고 해서 10년 후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금의 빚을 5년 후에도 못 갚을 것이라고, 지금의 봉급으로는 평생 남들처럼 못 살 것이라고 미리 계산하여 체념한다. 지금 가난하므로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라고 미리 계산기를 두들겨 대면서 미래의 삶에 절망적인 번호를 매기고 만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러저러하므로 5년 후, 10년 후에도 이러저러할 것이기에 희망이 없다고? 너무 계산이 빠른 것 아닌가? 점쟁이도 자기 미래는 모르는데 어떻게 감히 신의 영역인 미래를 스스로 투시하고 미리 계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자가 되려면 미래 방정식에 지금의 처지를 대입하면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 결코 그런 짓을 하지 말라. 트레인스포팅 게임처럼 우리에게 달려오는 삶의 번호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논두렁에서 군사를 일으켜 일약 군왕이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시장 거리에서 춤추던 무희가 하루아침에 황후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지 않은가. Don’t cry for me Argentina 의 주인공 에바 페론 역시 술집 종업원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영부인이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나 절망적이었던 내가 부자로 살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흔히 이야기 하듯 사람 팔자 시간문제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미리 계산하여 절망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그저 이 순간부터 당신의 미래 언젠가에 무슨 일인가가 새로 일어날 수 있도록 책을 읽고 지식을 축적하라. 절대로‘내가 이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겠어?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하는 따위의 생각은 추호도 갖지 말라. 그것 역시 미래 방정식에 현재의 시간을 대입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며, 패자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단 조건이 있다. 뭘 배우던지 간에, 뭘 하던지 간에 미친 듯이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하여라. 그렇게 할 때 미래는 그 암흑의 빗장을 서서히 열어주기 시작할 것이며 조만간 그 빗장 너머에서 비쳐지는 강렬한 태양빛 아래에서 당신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몇 년째 살아 왔음에도 변화가 없다면 당신은 그저 삶의 번호를 잘못 찍는 바람에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다. 그 잘못된 길에서 절망하지 말고 빨리 깜박이를 키고 길을 바꾸어라. 내 말을 믿어라. 거기서 새 삶이 무섭도록 빠르게 달려온다. 정말정말 그렇게 되느냐고?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하나만 이야기 하자.

신문에 칼럼을 기고를 할 당시, 절망감이 가득찬 독자로부터 메일을 계속해서 받았다. 이른바 괜찮다는 대학의 인문학과를 나왔지만 이혼하여 혼자가 된 상태에서 뚜렷한 기술이나 직업도 없는 30대 초의 독자였다. 그저 막연한 생각으로 약대나 한의대에 다시 가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게다가 중고생을 부업 삼아 가르치며 모은 얼마 안 되는 돈 마저 주식투자로 다 날렸지만 몰락한 집안을 이끌어 가야 하는 처지였다. 답변 메일에서 나는 생각의 방향전환을 강조하면서, 부업 삼아 하던 과외 일에 미칠 것을 권유하면서 프로가 되는 법을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알려 주었고 그 독자는 내 지시대로 하겠다고 하였다(나는 내게 메일을 보내는 모든 독자에게 똑같은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절대로 나에게서 개인적인 친절함은 기대하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즉각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머뭇거리면서 내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질문들은 정확히 표현하면 궁금한 점들이 아니라 안달이었고‘내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세이노 말처럼 과연 될까’하는 끊임없는 의심이었다. 왜 사람들은 내가 이미 실제로 경험한 것을 말해 주는데도 믿지를 못할까? 정말 이러한 의심은 미래를 미리 계산하여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가난한 자들의 공통적 특성이다. 승자는 먼저 달리기 시작하면서 계산을 하지만 패자는 달리기도 전에 계산부터 먼저 하느라 바쁘다(유대경전에 나오는 말인데 정말 진리이다).

미래를 미리 계산부터 해보려는 그의 태도에 나는 짜증을 엄청 냈으며 결국 그는 내가 제시한 방법론을 받아 들였다. 1년이 지나자 그의 예금액은 수천만 원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채 못 되서 그 금액은 2억 원이 되었고 거기서 다시 6개월여가 지나자 그가 내게 보고한 예금액은 3억 원에 달하였다. 물론 내가 아주 약간의 재테크 조언을 해 주기도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내 조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조언 중 하나가‘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에서 나온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고? 그 독자의 프라이버시와 세무서 때문에 안 된다. 내가 꾸며낸 이야기 아니냐고? 야, 이 닭대가리야!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인 줄 아느냐? 쯧쯧.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나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일과 관련된 공부를 할 때는 피를 토하는 자세로 하라고 한다. 특히 30대 중반 이전에는(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적어도 2-3 년 동안은(길면 길수록 좋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길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없어야 하므로 최대한 일터나 학교에 가깝게 살면서 시간을 아끼고, 밥을 많이 먹으면 졸려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므로 밥을 굶거나 조금만 먹으라고 하고(내가 밥을 굶으라고 까지 하는 것은 실제로 쫄쫄 굶으라는 뜻이 아니라 밥 대신 다른 것을 간단히 먹으라는 뜻이다), 시간을 철저하게 아끼려면 라면 하나를 끓여 먹는 시간도 아껴야 하므로 그냥 씹어 먹으라고까지 말한다(너무했나? 실제로 나는 5-6개월을 아침은 안 먹고 점심은 미리 삶아 놓은 계란 두개 혹은 라면 부스러기나 찬밥 물에 말아먹기, 저녁밥은 작은 공기 하나 정도로 때운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아침을 전혀 먹지 않으며, 오후의 식곤증을 없애고자 점심을 반만 먹을 때가 많다).

내가 그렇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그러다가 건강을 해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이다. 자기도 그렇게 해 보았었는데 위장병만 생기는 바람에 아직도 고생한다는 말도 하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요통만 생겼다고 하기도 하며‘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역시 건강이 최고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건강 걱정 하면서 그렇게 계속 튼튼하게 살아라.

81년부터 90년까지 10년간 언론에 게재된 자살기사 총 4백11건을 분석한 논문(중앙대 의대 박동철)에 따르면 자살동기는“경제적 가난”이 86건(21%)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정서적 갈등”79건(19%),“부부갈등”66건(16%),“학업문제”24건(6%) 등의 순이었다. 또 자살의 심리적 원인은“절망 및 고독감”1백17건(29%),“열등감”52건(13%),“갈등 상황도피”47건(11%)의 순으로 조사됐다. 연령층별 자살률은 20대가 가장 높고 다음으로 30대, 10대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남자가 여자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 통계청이 내놓은‘99년 한국인의 사망원인분석’에서도 자살자는 10~30대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였고 그들 세대에서 자살은 교통사고 다음의 최대 사망원인으로 나타났다. 즉 자살자들은 젊고 싱싱하고 건강한 10대~30대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건강 상실이 동기가 되어 자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은가. 흔히 사람들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고 모든 것을 잃었다면 당연히 절망하여 자살할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인해 자살 하는 사람들 보다는 건강하고 탱탱한 몸을 갖고 있음에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사실 말이다. 건강하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데도 왜들 그렇게 죽으려고 하는 것일까? 몸이 건강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갖게 되어 고민 끝, 절망 끝, 행복 시작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아닌가.

어느 독자에게 프로 과외선생이 되는 쪽으로 삶의 방향전환을 권유했던 적이 있다(‘미래를 미리 계산하지 말라’항목을 참조하라). 그때 일을 어떻게 하는지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면서 빠지지 않은 사항이 있는데 농땡이 치지 말고, 학생을 손님으로 여기면서 하루 종일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일, 즉 교재를 준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만 미친 듯 몰두하라는 것이었다. 일요일이건 공휴일이건 간에 쉬지 말라고 했다. 그가 내 지시대로 몇 개월을 하다가‘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쉬고 싶다’고 하였을 때 내가 한 말은‘엄살떨고 있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였다.

1년 정도 지나‘피곤함에 쓰러져 며칠 동안 병원에 있었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내가 한 말은‘당장 종합 비타민을 두 알씩 먹어라’였다.‘돈도 좋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지 않느냐’는 그의 말에 내가 한 말은 이랬다.‘그 잘난 건강을 가지고 있었을 때 너는 당장 죽고 싶은 마음 뿐 이었지 않은가. 자살하는 사람들 중 99%는 건강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그러니 개소리 말고 밥이나 철저하게 제 때 찾아 먹어라. 차가운 샌드위치라도 제 때 먹기만 하면 죽지는 않는다.’내가 그에게 한 달에 하루는 푹 쉬어도 좋다(일주일에 하루가 아니다!)고 한 시기는 그의 예금액이 2억 원을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였는데 메일을 주고받은 지 2년이 채 안된 시기였다.

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을‘신체적으로 병이 없는 상태이면서 정신적, 사회적으로도 안녕인 상태’라고 정의한다. 몸 건강한 노숙자는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는 아니므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몸 하나 튼튼하다고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가 아니면 육체적 건강은 위협을 받는다. 핀란드의 투루크시 직업병전문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기가 침체 국면에 있을 경우 근로자들은 더 많은 질병을 앓게 되는데 고용불안과 일터에서의 분위기 변화 등으로 불안감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며, 실제로 실직하게 되면 사망률마저 높아진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연구팀은 250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실업률이 낮을 때 실직하면 사망하기 쉬우나 실업률이 높을 때는 그럴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연구팀은 실업률이 낮을 때 실직한 사람은 본래부터 건강에 나쁜 생활습관과 성격 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사망률이 높은 것이며 실업률이 높을 때는 심신이 건강한 사람들도 실직할 가능이 높아지고 주변에 실직자가 많다 보니 실직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줄어들어 사망률이 낮다고 덧붙였다.

한편 의학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과중한 업무를 하게 되면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면서 신경이나 관절 등 신체 조직이 긴장하여 면역력이 떨어지고 뇌출혈, 심혈관계 질환, 뇌경색, 심근경색 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여 보면 결국 능력을 키워야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고 건강도 유지할 수 있다. 능력을 키우려면 내가 권유하는 바대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낮에 일을 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피곤함이나 체력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여야 할까?

나는 육체를 하루에 열 몇 시간씩 혹사 시키라는 것이 아니다. 육체에는 한계가 분명 있다. 때문에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 우리 몸은 기계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두뇌의 활동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휴식 삼아 영화를 보건 음악을 듣건 뭘 하건 간에 두뇌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잠을 자지 않는 이상 두뇌는 계속 활동한다. 심지어 잠을 자는 동안에도 눈동자가 움직이고(REM) 뇌파의 변화가 있는 것을 보면 두뇌는 수면 중에도 완전히 쉬고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내가 피 토하듯 하라는 것은 어느 한 분야에 정신을 계속 집중시키면서 두뇌를 계속 사용하라는 뜻이다.

물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엄살은 부리지 말아라. 나 역시 건강체는 아니다. 몸무게도 표준 체중보다 미만이고 나이 50에 허리둘레 30인치를 갖고 있을 정도로 말랐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큰 병도 몇 번 앓았던 경험이 있다. 번역일을 할 때는 하루 열 몇 시간 이상 원고지를 메꾸느라 어깨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아픔을 늘 갖고 살았다. 잦은 해외 출장으로 인한 시차 때문에 위장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한 적도 있고 몇 년에 한 번씩 재발하곤 하는 십이지궤양을 아직도 갖고 있다. 급성 폐렴에 걸린 줄도 모르고 지독한 감기에 걸렸나 보다 생각하며 돌아다니다가 병원에 초응급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 심한 목 디스크로 고생하기도 했었다. 아프리카 깊은 산속에서 어깨에 벌레물린 물집 같은 것이 생겨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엄청 아파 고생한 적도 있다(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진찰을 받아보니 대상포진이라는 병이었다). 게다가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다 보니 파편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거의 실명 위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하지만 나도 늙어간다. 30대만 하더라도 코를 골거나 이를 갈거나 방귀를 뀌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를 갈거나 코를 골 때도 많다고 하며 가끔 저녁에 방귀도 뿡뿡 뀌는 것을 보면 몸이 확실히 예전과 같지는 않다. 내가 20대부터 40대 초까지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뭔가를 읽고 배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신체리듬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한참 일하였던 시기에는 취미 생활을 위해 몸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였는데 그 다음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밤에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나는 세상없어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새벽까지 술을 마심으로써 다음날 엉망이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10년에 한번 정도뿐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원들은 술을 통제하지 못하고 마셔대는 사람들, 교회에서 철야예배를 마치고 출근하는 사람들, 일요일에 등산이니 뭐니 하면서 몸을 극도로 사용한 뒤 월요일에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육체의 리듬을 깨는 일은 토요일에 할 것을 권유한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하다가도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건강이 최고다”는 말에서 피난처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 노력의 결과가 즉각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기에 기쁨을 즉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학생의 경우 죽어라고 공부한 결과 몇 개월 후 치룬 시험에서 성적이 쑥 올라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신이 나서 누가 뭐라고 하건 간에 공부하게 되고 자기가 공부하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깨달음도 얻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에 변화가 없었다면 노력할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면서 소화가 안 된다느니 등등 갖가지 질병을 달고 다니게 된다. 사람들이 노력을 열심히 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비슷하다. 몇 개월을 열심히 해 보아도 수입이 즉각 느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가시적 효과가 즉각 나타나지 않으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결국 싫증만 느끼게 된다. 쉬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가시적 결과를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라. 당신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주고 칭찬하여야 할 주체는 타인이나 직장이나 사회가 아니다. 왜 상을 누군가로부터 받으려고 하는가. 상은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 진짜이다. 새겨들어라. 훌륭한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자기 그림이 마음에 들 때까지 붓을 놓지 않는 법이다. 당신 역시 당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수준이 스스로 흡족할 때 까지 그렇게 해라. 스스로 얻게 되는 뿌듯함, 내가 여기까지 알게 되었구나 하는 벅찬 기쁨, 이런 것들을 소중히 여길 때 스트레스는 사라진다.

둘째, 쉬고 싶은 이유를 생각하여 보라. 당신이 허약 체질이라도 재미있는 컴퓨터 게임은 쉬지 않고 24시간 이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를 느끼는데다가 육체적 에너지의 손실이 크지 않고 두뇌를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이 아닌 일에서 자꾸 쉬고 싶어지는 이유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이 비비 꼬이고 싫증이 날 때는 자기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재미를 느끼기만 한다면 스트레스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 일이나 재미있게 하라”항목을 참조하라).

셋째,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반드시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라. 문제는 그 시기가 당신이 생각하는 시간 보다 더 미래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나는“보상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돈다. 가속도가 붙기까지는.”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노력을 해도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일도 물론 있다. 미련하게 무조건 한 우물을 파지는 말라는 말이다(“이런 일은 하지 말아라” 항목을 참조하라).

넷째, 긴장감을 잃지 말아라. 긴장감이 있다면 싫은 것을 오래 동안 억지로 하여도 탈이 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식사도 제때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병사들이 건강을 해쳐 죽었다는 말 들어 본 적 있는가?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긴장감 때문에 그럴 틈이 없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알 것이다. 제 아무리 몸이 아파도 점호 시간에는 정신이 버쩍 든다는 것을. 결국 모든 것은 당신 정신 상태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배수의 진을 치라는 말이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육체의 건강을 우선으로 친다고? 아무도 안 말린다. 그러나 그 튼튼한 몸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 그 육신의 존재 이유를 한번쯤 생각하여 보면 어떨까? 그저 오래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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