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사성어

철중쟁쟁(鐵中錚錚)

鐵:쇠 철. 中:가운데 중. 錚:쇳소리 쟁

여러 쇠붙이 중 유난히 맑은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사람을 이름.

후한(後漢) 때 광무제(光武帝)의 이야기이다. 그 때 나라안은 군웅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장안(長安)에 적미(赤眉), 농서에 외효, 하서(河西)에 공손술(公孫述), 수양(雖陽)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에는 장보(張步) 등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황제는 먼저 적미(赤眉) 토벌을 시도했다. 적미는 전한 경제(景帝)의 자손에 해당하는 유분자(劉盆子)를 황제에 추대하고 있어서, 황제는 등우(鄧禹)와 풍이(馮異)를 보냈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황제가 몸소 출진하여 겨우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대장 번숭(樊崇)이 유분자를 데리고 웃통을 벗어 스스로를 벌하는 모습을 하고 항복해 온 것이다. 그래서 유분자에게 물어 보았다.

"그대는 자기의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닌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유씨 일족을 망신시킨 놈" 이어 번승에게 물어 보았다.

"아군의 실정을 보고, 항복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때, 다시 일전을 해볼 텐가?"

함께 항복한 참모 서선(徐宣)은, 숭이 입을 여는 걸 기다리지 않고, 머리를 땅에 내리치면서 말했다.

"저희들은 호랑이 입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품에 돌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항복한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할 뿐, 후회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수는 서선을 향해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대는 철중쟁쟁(鐵中錚錚)이고 용중교교(庸中교교(人+交)로다."

유수는 그들에게 낙양에 살곳을 마련하고 전답을 하사했다.

'용중교교'란 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이다.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좀 나은 자를 두고 말한다. 광무제의 생각은, 정말 유능한 인간이라면 시세의 추이를 통찰해 벌써 귀순했을 것이고, 천하의 대세를 분별 못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아직도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고 있을 것이다. 항복한 시기는 결코 이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어리석은 자에 비하면 차라리 낫다고 본 것이다.

[출전]《後漢書》《유분자전(劉盆子傳)》

역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