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이 인육을 드셨다는 공식기록은 없습니다.

고대의 인류역사.문자를 가졌던 중국같은 문명국은 여러가지 사실대로 기록하고,문자없던 나라들은 기록할 내용이 없었던 역사.

고대의 인류역사 관련, 문자를 가졌던 중국같은 문명국은 여러가지 사실대로 기록하고,문자없던 나라들은 기록할 내용이 없었던 역사. 문자를 일찍 가진 고대중국역사나 성경에는 인육먹은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한자를 수입해 문자로 기록하게 된 이후 한국도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때,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식인풍습. 선사시대 유적에 따르면 식인풍습은 남동유럽과 서남아시아에서 주로 있었다. 역사시대에도 여전히 존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뉴기니,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중국과 인도의 일부 지역,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대다수 지역, 북아메리카의 동부와 중부, 중앙아프리카와 서부아프리카 등이 있다고 나옵니다.

한편

醢는 육장.젓갈로 형벌해와 다름. 소금.양념넣고 육류로만든 醢는 한국의경우에도 제사.결혼예물.김치에도 들어가는 문명의 산물.중국문물 수입,한국도 신라때부터 醢등장.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나옴.황하문명,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나라 중국과 양념도 잘몰랐고 지금도 회.맛없는간장이 주식인 일본.2차대전중 미군.중국인 인육먹어 재판받은 현대식인종 일본.하느님.창조신 이기려던 일본 불교Monkey. http://blog.daum.net/macmaca/3051

중국의 식인문화 (Cannibalism In China)

황문웅의 "중국의 식인문화"에 대한 글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황문웅이라는 사람은 대만의 친일파라고 한다. 책이 출판된 것도 중국을 깔보기 위한, 일종의 일본 극우파의 선전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극우파는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아시아권 나라를 체계적으로 깍아내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식인문화"라는 것.

사실 만두는 제를 올리기 위한 음식이라고 한다. 사람 머리를 잘라 제를 지내야 하나 병사를 희생시킬 수 없어 사람 머리 모양의 음식을 만들어 제를 지낸 것이 시초라는 것.

만두를 먹는다는 것은 식인을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일까?

또한 삼국지 등에 나오는 식인에 대한 이야기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유비가 포를 좋아한다고 하여 포가 인육으로 만든 포라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중국의 식인문화라는 글 속에는 -인육을 저며 육젓을 만든것, -인육을 말려 만든 요리, -인육을 구워 만든 요리 등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포와 자의 경우 일반적인 요리법이라는 것이다. 재료가 반드시 인육이라는 법이 없는데 이를 마치 인육을 요리한 것을 포와 자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땅덩어리가 크긴 하지만, 걷어차이는 것이 사람일 정도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인명경시 풍조도 심한데, 이런 영향으로 식인 괴담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반론

초록불

3000년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 김택민 지음/신서원

http://orumi.egloos.com/1757490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num=75246

1.

논어의 향당편을 보면 공자님의 밥상에 관한 이야기가 올라온다. 가히 내용과 형식, 실천을 중요시한 공자답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밥은 정미된 흰 쌀밥을 싫어하지 않으시고, 회(膾)는 가늘게 썰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밥이 쉬어서 냄새가 나거나 맛이 변한 것과, 또한 생선이 상해 냄새가 나고 뭉그러진 것은 먹지 않으셨다. 알맞게 익지 않은 것도 먹지 않으시며, 때가 아니면 먹지 않으셨다. 바르게 잘라지지 않았으면 먹지 않으셨고, 간이 맞지 않는 것도 먹지 않으셨다. 고기가 많아도 주식보다 많이 먹지 않으셨다. 술은 양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취해서 난잡하게 되는 일이 없으셨다. 시중에서 산 술이나 육포는 먹지 않으셨다. …나라의 제사를 도와주고 제물로 받아온 고기는 밤을 넘기지 않으셨다. 자기 집 제사에 썼던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 않으셨고, 사흘이 넘은 것은 먹지 않으셨다….” 공자가 '싫어하지 않으셨다'는 '膾'는 고기육(肉=月)변이 들어갔듯 생선회라기보다는 육회를 의미한다. 조와 기장이 사대부들의 주식이었고 흰 쌀밥은 매우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취급되었던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볼때, 공자는 이 육회를 '싫어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별미로 즐겼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膾'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쇠고기로 만든 육회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자 다음을 읽어보자.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ㅡ주나라 이전의 왕조ㅡ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의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인 '해', 저며서 말린 고기인 '포(脯)', 구운 고기인 '자(炙)'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자,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아챘으리라 생각한다. 공자가 즐겨 먹었다는 육회는 바로 사람고기였던 것이다. 공자는 이 '해'가 없이는 식사를 안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가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져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지자 공자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나..

2.

이럴 수가, 인의와 예의를 중요시했던 공자가 사람고기를 먹었을리가 없다..는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식인문화는 중국에서 수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근대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정사(正史)에만 220여 차례 기록되어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러한 식인은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거나 충성심이나 효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행되기도 했는데, 급기야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었으며 송대에서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는 인육 요리책까지 출판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나타나 있다.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 중국 근대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에는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 사회에 만연한 식인의 사회상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노신은 고대 중국국가 성립 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 자멸해 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 것이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는 '유교=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식인문화는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산모의 태반을 요리하는 식당이 폐쇄당하는 등의 뉴스가 간간히 나오는걸 보면 이런 문화의 뿌리는 쉽게 제거되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다.

3.

이쯤에서 '문화상대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개념이다, 문화상대주의. 하지만, 문화상대주의는 학술적인 영역에서 실증적 분석에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일 뿐이다. 연구자의 문화적 편견으로 타문화의 본질을 왜곡없이 바라보아야 한다는 노력의 산물인 이 개념은, 그러한 분석의 결과물에 대한 규범적 판단까지 차단하는 것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남서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섬에서 '현지조사'라는 연구의 방법론을 시도하여 인류학의 경험주의 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 말라노프스키의 이야기는 이러한 문화인류학의 '문화상대주의'에 대해 재미있는 관점을 제공해준다. 이 섬에서는 근대의 유럽인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조개껍질이 부와 권력의 축적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주민들은 이러한 조개껍질의 채취라는 무익해보이는 행위에 노동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말라노프스키는 이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그 속으로 들어가 트로브리안드 주민들의 문화를 중립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분석해내는 성과를 거두며, 이러한 연구방식은 지금까지도 문화인류학의 보편적인 방법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냉정하고 중립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바라본 것으로 알려진 말라노프스키도, 후일 발견된 그의 노트ㅡ일기장같은ㅡ에서는 'X같은 미개인들 같으니' '말귀도 못알아듣는 XX들' '조개껍질이나 캐는 XX들'이라는 식의 욕설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다른 예로 인도의 혼인풍습을 들 수 있다. 카스트라는 강력한 봉건적 사회체계가 남아있는 인도에서,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으로만 취급될 뿐이다. 여기서 혼인은 종종 부유한ㅡ상대적으로ㅡ하위카스트 가문의 여성이 가난한 상위카스트 가문의 남성과 맺어져 신분상승을 노리는 장치로 이용되는데, 그 대가로 우리 상식으로도 거액의 지참금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결혼 후에도 지참금이 부족하다며 학대당하는 여성들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시어머니나 남편의 방화로 '부엌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위장된채 살해당한다. 누가봐도 살인이 분명한 경우라도 경찰이 수사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 문화인류학자는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지참금 살인'에 대해 선입견을 최대한 배제한채, 이러한 문화가 나타나게 된 그 나름의 원인을 분석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타문화를 편견없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지, 그러한 살인을 옹호하거나 용납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느냐의 단계에서는 규범적인 의도가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도의 지참금 문화는 한국의 결혼문화와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상위카스트의 남자와 결혼한 주제에 지참금이 부족하다'고 살해당하는 인도여성은 '의사나 변호사 남편과 결혼한 주제에 혼수가 충분하지 않았다'며 학대당하는 한국여성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보인다. 이 경우에도, '여성에게 억압적인 한국의 결혼문화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니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4.

다시 중국의 식인문화로 돌아와보자.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중국의 식인문화는 5천년을 관통하며 지속되고 있고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을 하였다.

왜 중국인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모자식간에서 배신을 하는가? 왜 중국인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가? 왜 중국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주의가 발달했는가 등등.. 이 모든 것이 식인문화와 관련이 깊다라는 것이다. 이는 식인문화로 인한 폐해가 중국인들의 사고에 미친 악영향을 정면으로 비판한 노신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문화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중국의 식인문화를 분석하자면, ①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도시로 인구가 과밀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연생태계의 균형이 깨져 발생한 기근과, ② 사적권력을 토대로 구축된 국가로 인해 자행된 가혹한 수탈이 그러한 문화로 이어졌다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식인문화가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중국의 식인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식인문화에는 동족을 먹는 내식인 문화와 타 종족을 먹는 외식인 문화가 있다.

폴리네시아 제도의 원주민들은 부족원이 사망하면 시신을 화장해 그 재를 바나나죽에 섞어 먹었으며, 대만 원주민들 역시 사망한 부족원의 인육을 구워먹었다고 한다. 이는 망자가 후손의 육신에 깃들여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내식인 문화는 대개 평화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반면, 외식인 풍습은 타 종족에 대한 적개심의 분출, 용맹함의 과시, 전리품의 획득과 복수의 실행이라는 맥락에서 이뤄진다. 지금도 격심한 내전 상황의 중앙아프리카에서는 적군의 시체를 불에 태워 구워먹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임진왜란때 권율 장군과 정기룡 장군이 왜장의 배를 갈라 생간을 씹어먹은 행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동족을 잡아먹는 행위는 동물계ㅡ영장류를 포함하여ㅡ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영양학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가장 완전한 식품은 인간이라고 한다. 다만 동족을 먹는 행위는 유전자 손상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무엇보다 사회를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식인은 사회를 유지하는 신뢰의 붕괴를 의미하게 되어 점차 금기시 되었다는 것이다. 내식인 문화와 외식인 문화가 공격성이라는 부분에서 차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식인문화는 어디에 들어갈 것인가? 중국의 식인문화에는 외식인적인 특성이 단연 두드러져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에게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자녀를 요리해 바치거나, 몸이 쇠약해진 부모를 위해 허벅지를 잘라 요리했다는 기록이 언뜻 내식인적인 특성의 발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들은 전쟁이라는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 제도화된 유교적 위계질서라는 간접적인 폭력에 대응해 나타나게 된 외식인 풍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충(忠)이나 효(孝)를 동기로 하는 이러한 '자발적'인 인육 제공은 신하는 왕의 소유물이며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유교적 위계질서에 그 근본을 두고 있으며, 결국 그들의 희생은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적응의 결과였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식인의 기록이 종종 처형의 전리품을 나누거나 왕이 신하를 먹어 권위를 과시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과 결국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Solomon Asch의 집단동조에 관한 실험(1952)을 언급하려고 한다.

애쉬는 한 명의 피험자와 다섯 명의 가짜 피험자ㅡ물론 진짜 피험자는 이들이 가짜인지 몰랐다ㅡ를 모아놓고 수직선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리고 길이가 서로 다른 세 개의 수직선을 보여주면서 어떤 수직선이 먼저 보여준 수직선과 길이가 같은지를 대답하게 하였다. 이 판단은 아무 분명해서 누구나 답에 확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피험자들에게 차례로 대답하게 하면서 차례가 마지막인 진짜 피험자 전에 가짜 피험자들이 모두 일관되게 틀린 답을 대답하자 많은 진짜피험자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 갈등을 느끼게 된다. 결국 32%의 피험자가 다수의 의견에 동조했음이 밝혀졌다.

재밋는 것은 애쉬의 집단동조 실험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하자 다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비율이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강한 집단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일본인들에 대한 의외의 실험 결과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음은 물론이다.

결국 이는 서구인들과 일본인들이 상이한 내집단-외집단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오르 이어졌다.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본인들의 내집단은 서구인들의 내집단보다 훨씬 결속력이 강하고 유대가 깊은 반면, 그 범위는 오히려 더 작고 폐쇄적인 특성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서구의 '진짜 피험자'들에게는 '가짜 피험자'들이 느슨하고 개방적인 내집단에 속한 것으로 느껴지는 비율이 높았던 반면, 일본인 피험자들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그들이 외집단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태도가 증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집단-외집단 개념에 대한 이해는 중국의 식인문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일단 전쟁, 기근으로 식인풍습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 일정한 법칙이 있었는데,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 등으로 순서가 옮겨갔다고 한다. 나중엔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 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이 다음 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간에는 관에 줄이 있어 파벌에 속한자가 속한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는다.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흔히들 대만 자본주의의 특징을 철저한 가족중심주의라고 설명하는데, 실제로 대만인들은 가족단위의 개인기업들이 경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유교적 가족개념을 사원에게까지 확장시키는 일본이나 변형적인 타입인 한국의 재벌과는 다른 개성을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상장이나 동업관계를 통해 사업을 크게 확장하기보다는 일정 규모를 유지하면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가족단위로 사업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식인문화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노력의 결과로 중국의 대가족제도가 정착되어 왔기 때문은 아닐까? 중국의 대가족제도는 잡아먹히는 순서 상 숫자가 많을 수록 생존률이 높았기 때문에 대가족을 통해 숫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적응 노력의 제도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생존을 걸었던 대가족이라는 내집단의 결속력은 매우 강력했으며, 반대로 외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속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생명을 지키려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대가족은 종종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온 '가족단위로 생존한다'는 의식이 지금도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5.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이러한 식인문화를 바탕으로 중국문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전혀 문화절대주의적인 독선이 아니다. 이 정도는 문화상대주의의 영역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국가와 중국의 인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명과 인권에 대한 경시 태도를 비판하거나 그들의 편협한 가족주의나 대국주의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근현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는 느리지만 그러한 역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왔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식인의 역사'는 동시에 '반(反)식인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에 하나가 "만일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식인문화가 어느 정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반면 "예"와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의 시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반식인의 대상은 동족에만 한정되었다. 타인의 고기는 태연히 즐기다가 제자의 고기가 나오자 격노한 공자의 모습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도 중국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그러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라는 근대사상은 중국인들의 인간관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식인문화가 근절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중요한 것은 센세이셔널한 중국의 식인문화에 집착하면서 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식인문화와 이에 대항하는 반식인문화가 현대의 중국을 구성하는데 있어 어떤 영향을 미쳐왔냐는 것이다. 사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한 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짱께 식인종 새끼들, 그럴줄 알았어'라는 유아적인 반응이나 '역시 다리 달린건 의자만 빼고 다 먹는다는게 사실이었군'이라는 식의 비아냥을 보이기 보다는, 이러한 갈등 및 대립관계의 한 축이 형성해온 중국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중국의 식인문화에 대한 비판은 많은 부분 우리 스스로에 대한 비판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도의 지참금 결혼과 한국의 혼수 결혼의 관계와 유사하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본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컨대, 항상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리의 유교문화나 집단주의문화를 중국이라는 거울을 통해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식인문화는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도(degree)'의 차이에 집착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공자님의 밥상을 물려받으려고 그토록 애를 써왔던 우리 아닌가? 이제는 그 밥상 위에 뭐가 올려져 있었는지, 한번쯤 냉철하게 생각해볼 때라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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