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누마 사회당 위원장 살해사건

1960년 10월 12일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있었던 "여야 3당 당수 합동연설회"에서, 아사누마 이나지로우 사회당 위원장이 연설하던 도중에, 교복차림의 소년이 갑자기 연단으로 뛰어 올라, 가지고 있던 일본도로 아사누마 위원장을 찔렀다. 이 사건을 '아사누마 사회당 위원장 살해사건'이라 한다.

사건을 일으킨 소년은 "야마구찌 오또야"라는 이름을 가진 우익단체 "전 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다. 1960년 10월 12일은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3당 당수 연설회"가 열리고 있었고, 마침내 사회당의 당수이던 아사누마 위원장의 차례가 되었다.

"자민당 이께다 총리는 세금의 증가가 마치 자신의 수완인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증가는 어떻게 생겼는가? 일본 국민이 피와 땀으로 벌어서 낸 것이 아닌가? 세수의 증가란 국민으로부터 혈세를 초과징수 했다는 결과가 아닌가?" 라고 연설하였다.

이 때, 좌석을 점거하고 있던 우익단체일원들은 "중공, 소련의 앞잡이, 용공 사회당을 분쇄하자!" "붉은 깃발 사회당을 추방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살포하며 "중공의 허수아비 개 돼지 같은 놈!"이라는 야유를 퍼 부었다.

그러나 아사누마 위원장은 연설을 계속하였는데, "선거 때에는 국민의 평판이 나쁜것을 제쳐두고, 선거에서 다수를 점하자…" 연설은 이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교복을 입은 소년 한명이 갑자기 연단위로 뛰어 올라와서, 무엇인가 알수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휴대한 칼로 아사누마 위원장의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죽음을 확인하려는 듯 재차 다시 한 번 찔렀다. 아사누마 위원장은 다량의 내출혈로 곧 숨졌다.

두 번을 찌르고, 다시 한 번 찌르기 위해 칼 끝을 향한 순간 형사 한 명이 야마구찌의 칼을 맨손으로 잡고 있었다. 야마구찌는 칼을 빼 내려면 빼 낼 수 있었으나, 무리하게 빼 내면 그 형사의 손가락이 잘려 나갈것을 알고 있었다. 야마구찌는 칼 손잡이에서 손을 내려놓았고, 즉시 체포되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자신이 쓴 편지가 한 통 발견되었는데,

"너 아사누마 이나지로우는 일본의 적화를 기도하고 있다. 나 자신은 너 개인 한 사람에게 원한이 없으나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방중 때의 폭언과 국회난립의 직접 선동자로서 책임으로 볼 때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 나는 너에 대해 천벌을 내린다.

황기 2620년(1960년) 10월 12일 야마구찌 오또야"

1959년 아사누마는 사회당 방중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 북경을 방문하였으며,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미 제국주의는 중일 공동의 적"이며, "미일 안보조약의 파기"등을 공약했다. 또 6/19일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방일 예정이었으나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동이 된 "반미 안보 데모"가 격화되어 방일이 무산되었다. 야마구찌는 살해의 이유를 이것들로 삼은 것이다.

야마구찌 오또야는 독방에 감금되었으며 11/2일 동경소년감별소로 옮겨진 직후 자신의 셔츠를 찢어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직후 인공호흡을 실시하였으나, 사망하였고 벽에는 치약으로 "칠생보국(일곱번 태어나도 나라에 보답한다), 천황폐하만세"라고 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