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맹정음

세종대왕은 1446년에 ‘훈민정음’을, 송암 박두성 선생(1888 ~ 1963) 은 1926년에 ‘훈맹정음’을 반포하였다. ‘훈맹정음’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든 우리말 점자이다.

시각장애인들이 하고 싶은 학업을 마음껏 할 수 있고, 사회에서 각기 자신이 맡은바 일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은 바로 이 점자이다.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게 지면에 볼록 튀어나오게 점을 찍어 손가락 끝의 촉각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든 특수한 부호글자이다. 1808년 프랑스의 육군장교 바르비에(Barbier)는 야간전투에서 군사용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만져서 읽을 수 있는 점으로 된 야간문자를 고안했다. 이같은 야간문자를 가지고 5살 때부터 맹인으로 살아야 했던 프랑스의 브라유(Louis Braille)가 1829년에 고안한 것이다. 크고 작은 6개의 점의 배열을 여러 가지로 해서 문자 및 부호를 나타내게 한 것으로, 현재 세계 각국의 표음문자를 쓰는 나라는 이것을 그 나라 문자에 맞추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말 미국인 선교사인 R. S Hall 여사를 통해 점자가 처음 도입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재생원(현 서울맹학교)을 만들면서 6점식 가나 점자가 들어왔다.

점자는 작고 둥근 6개의 점을 볼록하게 돌출되도록 만든 것이며, 점자는 6개의 점이 모여 한 칸이 되는 것이다. 이 6개의 점은 세로로 3개, 가로로 2개로 구성된다. 각 점에 1에서 6까지의 번호가 붙어 있다. 이 6개의 점 중에 어떤 점을 돌출시키는 지에 따라 63개의 각각 다른 점형이 생기며, 이 점형에 의미가 부여된 문자가 점자인 것이다. 한글의 경우, 초성과 모음, 종성 각각에 점형이 다르게 약속되어 있다. 우리나라 점자는 우리 한글의 우수성처럼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약 20여종의 점자 보다 그 우수성이 탁월하고, 사용자의 편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재생원 (현재 서울 맹아학교) 관제를 공포하고 그 안에 맹아부를 설치했다. 일제의 손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맹아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박두성 선생님은 이곳으로 발령 받으면서 남이 하지 않는 일 맹아학교에 첫 발을 들여 놓았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을 가르친다는 건 쉬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본 자료인 점자교과서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죠. 그는 강력히 주장하여 일본의 점자인쇄기를 들여오게 했고, 본인 스스로도 점자공부에 매달려 일어판이기는 하지만 한국 최초의 점자교과서를 출판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일제는 재생원 학생들에게도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송암 선생님은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이중 불구자가 되어 생활을 못하게 된다고 항의를 하여 결국 모국어를 사용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하루 빨리 한글 점자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해 한글점자 연구에 몰두했다. 학생들과 “조선어점자연구회”를 비밀리에 결성하고 연구를 거듭한 결과 드디어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을 반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박두성 선생님은 성경 외에도 총 79종에 이르는 책을 점자화 했다. 그가 임종 직전에 남긴 말. “점자책을 쌓지 말고, 꽃아 두라.” 점자책은 쌓아 두면 돌출부가 납작해져서 해독 할 수가 없는데, 평생 점자를 위해 산 그의 점자 사랑이 담긴 그다운 유언이다.

훈맹정음은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1998년 문화관광부의 '한국 점자 규정집'으로 정리돼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훈맹정음을 쓸 수 있는 시각장애인 수는 아직도 극히 적은 실정이다. 국내에 등록된 시각장애인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22만8,000여명, 이 중 점자가 꼭 필요한 1~3등급의 중증 시각장애인만 5만4,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점자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1만 명 정도에 불과하며 보급률도 과거와 비슷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시각장애인 단체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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