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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 대구 (당시 대구부 남산정) 출생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1)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생애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아버지가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어렸을 때부터 정말 가난했고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보조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재단사로 일하던 중 재단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박봉,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내용을 독학하려 하였으나 기준법 전문이 한자 투성이인지라 도통 내용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한탄했다고 한다.2)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며 읽었고 그렇게 읽어낸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재단사로 취직이 돼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벽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로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사회주의 조직이라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당시 한국에는 비록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형식적이었으며 감독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전태일의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뜻은 좋았지만, 당시의 경제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1970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고작 253달러에 불과했고, 265달러인 파푸아뉴기니보다도 못한 빈곤국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근로기준법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지켜지기는 불가능했다.

또한 근로기준법 자체가 북한과의 체제경쟁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그것이 실제 지켜질 것이라고는 입법을 추진한 당국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물론 지키지도 않을 법을 만든 것도 문제긴 해도, 국가 성립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입법 및 행정의 총제적인 부실현상이 있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전태일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사전에 자신의 친구 김개남에게 자신의 몸에 성냥을 그어 달라고 하였었으나, 익명의 친구가 뒤에서 불을 붙였다.

그는 자신을 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라고 외쳤다. 그러나 주변의 상인들이나 동료들도 불을 끄거나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하지않았다. 부근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측에서 보호자가 없고, 병원비에 대한 보증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응급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근로 감독관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당시 상황이 위중해 비싼 주사를 맞아야 했으나 주사 한대의 가격이 노동자 한달월급정도 였다고 한다. 따라서 근로감독관도 쉽게 허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당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말은 "배가 고프다…" 였다.3)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정치적 의미에서의 반독재,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 지식인들은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노동자,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의 대학생은 지금보다 훨씬 수도 적고 그야말로 엘리트로의 길이 보장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이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취업자'로 호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노동자들 스스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자주적으로 노조를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에 따라 70년대 중에 청계피복노조 이외에도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YH 사건의 그 회사)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세워져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운동한다. 이렇게 70년대에 세워진 민주노조는 대부분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집약적 사업장 위주로 세워졌으며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대우그룹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조가 대거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전태일은 모범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 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던 업체들에게 직공들의 근로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자본금이 부족하여 좌절되었다. 사업기획서까지 만들어 두고 작업장 배치와 근로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두었다.

가족

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이소선

이후 이소선은 아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청계피복노조 등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주화운동 유가족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같은 해 9월 3일 작고하였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 씨는 오빠의 뒤를 따라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민주통합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남동생 전태삼 씨 역시 노동운동에서 활동하였다.

전국노동자대회

매년 전태일이 죽은 11월 13일에 민주노총 주관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11월 13일이 주말이 아닌 평일이면 11월 13일 직전의 주말에 열린다. 한국 최대 노동조합인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총대회를 전태일 열사 기일에 여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동현안에 대한 의제가 기조로 설정되며, 전야제는 주로 문화제 형식으로, 본대회는 집회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

이 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 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수기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아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 1970년 8월 9일, 삼각산에서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지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 1969년 9월의 수기에서

비판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뜻은 좋았지만, 당시의 경제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우선 1970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고작 253달러에 불과했고, 265달러인 파푸아뉴기니보다도 못한 빈곤국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근로기준법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지켜지기는 불가능했다.

또한 근로기준법 자체가 북한과의 체제경쟁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그것이 실제 지켜질 것이라고는 입법을 추진한 당국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물론 지키지도 않을 법을 만든 것도 문제긴 해도, 국가 성립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입법 및 행정의 총제적인 부실현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당시에 성행하던 노동자 간 착취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모순된 점이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옥죈 것은 바로 '오야지'4)라 불리는 숙련공들이었고, 이들은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견습생들로부터 웃돈을 받거나 그들의 임금을 가로채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이를 근거로 전태일 본인도 재단사였으므로 동료 재단사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는 한편, 오늘날의 노조에서도 이러한 악/폐습이 그대로 이어지게 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전태일의 행동이 당시에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으나, 이 사건이 우리나라 노동 환경에 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 밖에도 또 다른 현실타협적 관점에서, 당시 전태일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생활고를 고려했을때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지, 노동자 인권이라는 거대하고 높은 목표에 대한 열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분신 이전 전태일의 행동, 이를테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에 대한 서적을 찾아가며 공부했다는 것과 재단사들 사이에서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었다는 것 등을 고려해야한다.

참고

1)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아무도 불을 끄거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고,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3~4시간 방치하였다.
2)
『전태일 평전』
3)
그는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은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4)
일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말 중 하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