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하여 3년 1개월 2일 동안 전개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전쟁이다. 사회주의의 맹주였던 소련의 팽창주의와 중국의 공산화로 외세의 힘을 빌어 통일이라는 명분아래에서 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다.

6.25 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한국전쟁’, ‘조국해방전쟁’(북한), ‘조선전쟁’(일본), ‘항미원조전쟁(중국)’으로 불리우지만 ‘6.25 사변’이라고 불리워져야 하겠다. 왜냐하면 ‘사변(事變)’의 사전적 뜻은 ‘선전 포고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므로 북한 김일성이 사전 선전포고 없이 대한민국을 침공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유하던 대한민국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였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휴전 협정으로 인하여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전쟁을 중단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상태지만, 휴전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북한의 갑작스런 침략에 대한민국은 후퇴를 하였으며,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했다.

1950년 7월 7일에 국제연합은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에서 40만 명의 국제연합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1950년 7월 25일에 국제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설정한 후에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8월 15일까지 부산까지 차지하겠다는 소련과 김일성의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국제연합군 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 아래 국제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여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10월 1일에 38도선을 통과하여 북으로 진격하여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10월 25일에 압록강에 도착한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전쟁은 치열해졌으며, 인해전술에 국제연합군은 1951년 1월 4일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체결되기까지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치열한 소모전으로 전개되었다. 6.25 전쟁으로 141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 374천 명이 희생되는 피해를 보았다.

대한민국에서는 6.25 전쟁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주류를 이루어 이승만 정권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산업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전쟁을 이용하여 김일성이 정적을 숙청하는 계기로 삼아 김일성유일지배체제를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김일성유일지배체제는 경쟁을 가로막아 북한의 경제가 침체되어 오늘날 식량난을 비롯한 경제 위기를 맞아야만 했다. 전쟁에 의한 통일은 이미 낡은 방식의 통일이다. 평화적 통일을 위한 남북한의 상호협력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의 신뢰회복이 가장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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