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발키리 (Valkirie, 2008)

작전명 발키리

2차세계대전 당시 1944년 7월 20일 무모한 히틀러 암살 및 쿠데타 시도를 내용으로한 영화. 톰 크루즈 주연

항목 점수
이야기 4/5
창의성 2/5
볼거리 2/5
재미 3/5

Operation Walkür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나치스가 비상시를 대비해서 세운 계획.

2차 대전 당시 독일은 수백만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포로를 독일로 끌고 와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해 놓고 보니 이 외국인 노동자들과 포로들이 독일 내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 걱정되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연합군이 대규모 전략 폭격과 함께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독일의 심장부를 마비시킨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회자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국방군 정보국(Abwehr)장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해군 대장이 독일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비상계획을 수립할 것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건의하였고,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여 독일 보충군 1) 총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 육군 상급대장에게 비상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한다. 프롬 장군은 국내 보충군 참모부장인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육군 보병대장에게 이를 일임하였고, 올브리히트 장군은 1942년 10월 13일에 이 작전을 입안하게 된다.

발키리 작전은 후방에서의 반란 등 위급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에 국방군 병력이 나서서 치안을 회복하기 위한 작전 계획이었다. 이에 필요한 병력은 당연히 주요 도시 인근의 후방 위수병력이 도맡아야 했다.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전선에 배치된 야전부대를 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방에서 신병을 훈련시키고 부상병, 휴가병을 재편성하여 전선에 보내는 역할을 하는 예비군 조직이 작전의 실행을 주도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동원 지정이 되지 않은 예비군들이 유사시 북한군 특수부대의 후방 침투를 대비해 향방작계 훈련하는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 발키리 작전은 말하자면 일종의 향방작계였다. 독일 안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보충군을 소집하여, 독일 국내의 국방군 및 무장 친위대가 모두 보충군의 지휘 아래 놓이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독일의 모든 시설들을 장악하고 군법회의까지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비상시에 작전의 발동 권한은 보충군 총사령관 프롬 장군이 갖기로 되어 있었다.

이 작전은 총통의 직접 명령에 의해 발령되는 것이 원칙이나, 예비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서도 발동될 수 있었다. 유사시 '발키리(Walküre)' 라는 작전 지령이 내려지면, 각 해당 부대들은 미리 지급받은 봉투를 뜯고 그 안에 지정된 담당 방어시설로 출동해야 한다. 이곳을 장악하고 예비군 총사령관의 이어지는 추가 명령에 따라 반체제세력의 준동을 진압하는 것이 이들이 부여받은 임무였다. 전시의 비상상황을 생각하면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조처이므로, 히틀러가 발키리 작전의 준비를 승인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반나치들은 이를 역이용하려는 생각을 해 냈다.

그런데 이 작전을 입안한 올브리히트 장군은 독일군" 국방군 내 반히틀러 비밀조직 '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 소속이었고, 계획 수립을 건의했던 카나리스 제독은 애당초 반나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던 데다가 한술 더 떠 검은 오케스트라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 계획을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시도때 히틀러를 암살한 이후 독일 국내를 장악하는 용도로 쓰려고 계획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이들은 '발키리 작전'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히틀러 암살과 나치 전복을 획책하게 된다.

작전 내용은 이러하였다.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동프러시아에 있는 총통 지휘소 볼프샨체에서 히틀러를 폭사시키면 예비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이(그는 아직 반나치에 들어갈 지를 결정하지 않았다.)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여 예비군을 동원해 나치를 전부 체포하고, 이어 베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협상해 가며 소련을 막는다는 계획이었다.

폭탄은 파편에 의한 살상이 아닌 화력에 의해서만 살상을 일으키는 폭탄인데 폭탄에 부속된 캡슐을 깨뜨리면 캡슐의 액체가 신관을 녹이고, 이어 뇌관을 건드리면서 폭발하는 폭탄이었다. 이런 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볼프샨체의 경계가 워낙 철통 같아서 호신용 권총은 물론 결혼 반지까지 전부 내어 놓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금속 폭탄을 사용할 수 없었다.

회의장폭파에는 성공하지만, 히틀러는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다리에 약간의 화상과 고막 파열, 그리고 팔에 나무 파편이 박히는 정도의 경상 2)을 입은 히틀러는 살아났다.

따라서, 거사 당일 발키리 작전이 발동된 이후에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히틀러 암살이 실패하여 쿠데타 역시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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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실패할 만한 것이, 수도 베를린의 주요 권력기관을 점령해야 하는 실전부대를 장악하느냐 마느냐가 쿠데타의 성공여부를 좌우하고 있었는데, 이를 음모자들이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발키리 작전 계획에 따르면 수도 내 권력기관들을 장악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정된 부대는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베를린 주둔)였는데, 이 부대의 총원은 고작 4개 중대였는데다가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자체가 육군 내의 친위대라고 불릴 정도로 나치이념에 충실한 병사들만이 입대할 수 있었다. 이런 부대를 단순한 지휘명령권 하나만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쿠데타에 투입(?)한 음모자들이 실수를 한 것. 실제로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의 지휘관인 레머 소령(사건이 마무리된 이후 대령으로 특진, 다시 소장 진급)은 검은 오케스트라 소속 지휘관들의 명령을 받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잡으러 갔다가, 괴벨스가 히틀러의 생존을 주장하며 직접 히틀러와의 전화통화를 연결하였기 때문에 쿠데타를 꾸민 지휘관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리어 진압 작전에 나섰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기의 회고록("기계화 부대장")에서 음모가들이 자기를 방문하여 가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고 하다. 이유는 히틀러 암살에 성공할 경우 국방군 총사령관에 등극할 베크가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믿을수 없었다고. 사실 구데리안은 베크와 사이가 아주 안좋았는데다가 철저한 히틀러 지지자였으니 믿기는 힘들다.

그 드라마틱한 전개 때문에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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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충군이란 예비군과 비슷한 개념인데, 독일 국내의 13개 군관구 전체를 통제하는 행정사령부로서, 각 군관구는 각 사단과 직결되어 신병 모집 및 동원병력 보충, 국내에서의 군사훈련 등 군정 업무를 맡았다.
2)
이후 팔에 가끔씩 마비 증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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