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교린(事大交隣)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 또는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은 조선 전기에 조공 관계로 맺어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확립된 기본 외교 정책이다.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방침이다. 1)

사대교린은 조선 전기에 확립되었지만 그 형태는 오래되었다. 고구려도 한나라(32년), 북위, 수나라 등 중국에서 강성한 왕조가 들어서면 조공 책봉관계를 맺고 외교적 이익을 취하였으며, 고려도 송나라나 금나라가 강성할 때는 이러한 외교관계로서 국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주변 약소 민족에게 회유와 토벌 정책을 실시하였다.

조선초기 사대교린정책

중국은 진시황 이래로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뒤쳐지게 된 근대를 제외하면 기나긴 역사 동안 중국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월등히 한반도 국가를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는게 이득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한족국가와의 교류는 전통적으로 사대의 형식으로만 가능했으며, 신하를 자처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동등한 관계에서의 외교란 불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대"는 외교의 한 형식일 뿐이었고, 한족과 맞짱떴던 무수한 이민족 국가들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정복했다가도 대부분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한반도 국가들은 "사대"의 형식으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질서에서 현재의 미국보다도 더 큰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자주성을 지상으로 삼아 중국과 적대를 계속 해왔다면, 현재의 북한과 같이 중2병스러운 국가가 될 뿐이고, 고구려꼴나서 문화가 사그라들어 결국은 만주처럼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사대교린정책은 조선의 입장에서도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외교였다. 게다가 여진과 일본에 대해서도 무역소나 항포 개항과 같은 회유책과 함께 4군 6진 설치와 쓰시마 정벌과 같은 강경책을 병행하였다. 이와 같이 사대교린은 외교 정책의 기본일 뿐이었다.

즉 조선은 개국 초부터 해마다 하정사(賀正使:정월 초하루)·성절사(聖節使:황제의 탄신일)·동지사(冬至使:동짓날 보내는 사신) 등을 정기적으로 명(明)나라에 보내어 사대의 예를 하였고, 이 밖에 사은사(謝恩使:고마운 처사가 있을 때)·주청사(奏請使:임시로 보고할 일이 있을 때)·진하사(進賀使:명나라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진위사(陳慰使:조선시대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또는 진향사(進香使:명황실에 불행이 있을 때) 등 수시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사행(使行)에는 중국 황실에 보내는 방물(方物:貢物)이 뒤따랐는데, 특히 명나라는 이 조공(朝貢)과 이의 답례로 주는 회사(回賜)의 형식 이외에는 모든 외국무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은 명나라의 문물을 얻기 위해서라도 사대(事大)의 예로써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쳐야 하였다.

한편 조선의 대(對)일본 교린은 왜구방지를 위한 평화적 회유책이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대일교섭을 통하여 고려 말기 이후 조선의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출몰하여 노략질해 온 왜구의 금압(禁壓)을 요구하였고, 일본도 조선 정부의 요구에 응하는 한편 조선과의 통교를 요구하여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의 역대 막부(幕府)의 장군은 일본국왕의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하였고, 조선에서는 통신사(通信使)·회례사(回禮使)를 보냈다. 또한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도주(島主) 소씨[宗氏]에게도 왜구 금압의 책임을 지우는 한편 조선에 대한 무역통제의 특권을 주었다. 여진에 대한 교린도 여진족이 국경지대에서 벌여온 노략질을 못하도록 달래는 회유정책이었다.

여진의 추장 또는 세력자들은 조선의 명예관직을 얻고, 일정한 규정에 따라 1년 또는 수년 만에 한 번씩 서울에 와서 조선국왕에게 숙배(肅拜)하여 형식상으로는 종속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여진이 노린 것은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의 진상(進上)과 그에 대한 회사(回賜)로 이루어지는 관무역(官貿易:賜與貿易)에 있었으며, 조선도 이들의 교역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가로 국경지대의 국방상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사대는 큰 나라를 섬김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보장받고, 교린은 이웃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방상의 문제점들을 해소하는 데 그 특징이 있으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진상(進上)과 회사 형식의 물물거래에 있었다.

이 외교정책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1876년에 일본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현재의 외교부 성격의 기관)에 강화도조약 1조에 명시된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조항에 대한 청나라의 의견을 구하자,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으며 그 조항으로 바뀌는 점이 없다면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답하였다. 또 사대교린정책은 조선의 입장에서도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외교였다. 게다가 여진과 일본에 대해서도 무역소나 항포 개항과 같은 회유책과 함께 4군 6진 설치와 쓰시마 정벌과 같은 강경책을 병행하였다. 이와 같이 사대교린은 외교 정책의 기본일 뿐이었다.

1)
본래 이 용어는 《맹자(孟子)》에서 나온 말로 전국시대의 제나라 선왕이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방법(交隣之道)을 물었는데 맹자가 대답하기를 "사대(事大)와 사소(事小)가 있어 인자(仁者)라는 것은 능히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섬기는 것이고, 지자(智者)라는 것은 능히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특히 중국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올려 이를 뒷받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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