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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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약진운동 당시 약 4천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은 마오쩌둥(1949~1959)의 오판 때문이다.

국공내전 승리 후 중국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마오쩌둥은 1958년 농공업 증산을 목표로 대약진운동을 추진한다.

농촌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집단 농장화나 농촌 철강 생산 등이 주요 정책이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경제를 발전시켜 10년 안에 중국 위상을 미국이나 소련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욕심에서 엉터리 정책을 마구잡이로 내놓았다.

그런데도 반대 의견은 거의 없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대약진운동의 부작용을 예측했지만, 모두 침묵했다. 탄압을 우려한 탓이다.

공산당 핵심 실세이던 팽더화이조차 어렵사리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숙청된 것도 반론을 막은 이유다.

토법고로 정책

마오쩌둥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토법고로' 정책은 시행하자마자 문제투성이로 드러난다.

전통기술(토법)로 만든 작은 용광로(고로)에서 농민이 강철을 직접 생산하자는 운동이다.

철강 대량 생산에 필요한 최신 용광로를 사들일 자본과 운영 기술이 없으니 인해전술로 미국이나 소련을 따라잡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이 운동에는 농민 9천만여 명이 동원된다.

강철 생산 경험이 없는 이들은 철광석이나 석탄을 어디서 구하는지조차 몰랐다.

허둥지둥 헤맨 끝에 고철을 주워다 용광로에 넣어 강철을 생산했다.

할당량을 채우려고 멀쩡한 농기구와 트랙터 같은 농기계도 용광로에 집어넣는다.

강철 생산을 늘려 최신 농기구를 보급하려던 토법고로 운동이 정반대 결과를 빚었다.

집에서 쓰던 식기류와 양철지붕도 용광로에서 녹아내렸다.

용광로 연료로 쓰려고 산천과 과수원 나무까지 벌목한 탓에 산사태가 빈발해 농경지를 망쳤다.

참새 박멸

마오쩌둥은 참새 박멸도 지시한다.

농촌을 시찰하다가 참새가 곡식 낟알을 먹는 모습을 보고 참새를 없애야 식량을 증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중국 최고 실력자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대륙 전역에서 대대적인 참새 소탕작전이 이뤄진다.

어른은 물론, 아이까지 새총을 들고 다니며 참새를 쏘아 죽이는 일에 동원된다.

그 덕분에 1년 동안 참새 약 2억1천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곡식 낟알을 쪼아 먹는 새가 사라진 후 농촌에서는 재앙이 발생한다.

천적 참새가 없어진 틈을 타 해충이 대량으로 번식해 곡식을 갉아먹은 탓에 희대의 흉작을 맞았다.

농업에 문외한인 마오쩌둥이 벼를 빽빽하게 심도록 지시한 것도 패착이었다.

모와 모 간격을 최대한 줄이면 소출량이 더 늘어날 것으로 믿고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

모는 최소 간격 이하로 좁혀 심으면 서로 생장을 방해하면서 병충해에 취약해지고 낟알이 줄어든다.

절대 권력자가 즉흥적으로 내놓은 식량 증산 계획은 대실패로 끝난다.

이 때문에 굶어 죽은 사람이 1천만 명을 넘은 것으로 발표됐다. 실제 사망자는 최대 4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차 대전 당시 최대 인명 피해를 본 소련 사망자 2천만 명보다 두 배나 많은 수치다.

대약진운동 시작 단계부터 나타난 수많은 실패 징후를 마오쩌둥은 감지하지 못했다.

협동농장이나 공장 등에서 질책을 피하려고 허위 보고를 일삼은 탓이다.

엉터리 통계수치가 난무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뒤늦게 문제점을 깨닫고 소련 연해주 참새 20만 마리를 수입했으나 들녘을 휩쓴 해충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수한 사람이 굶주림으로 숨지자 마오쩌둥은 1962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난다.

그 후에도 식량이 늘 모자라 배급제를 운용하고 부족분은 수입하는 방식으로 근근이 지탱했다.

덩샤오핑이 1978년 마오쩌둥 사후 정계에 복귀하고서 추진한 개혁개방정책이 성공함으로써 중국은 비로소 만성적인 식량난을 완전히 해결하게 된다.

흰 고양이나 검은 고양이나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다는 백묘흑묘론과 남쪽 기슭이든 북쪽 기슭이든 정상으로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남파북파론이 개혁개방의 성공 비결이다.

유연한 실용주의노선이 중국 인민을 기아에서 구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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